[밀물썰물] 숟가락과 젓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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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숟가락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 꽂은 숟가락은 훈련병에겐 M16보다 소중했다. 숟가락 앞에 포크가 달린 군용 숟가락은 1분 남짓 허락된 짧은 식사 시간에 최적화된 도구였다. 흙먼지 속에서 뒹굴다가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훔치고 다시 훔치는 각자도생의 투쟁이 벌어졌다.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논산훈련소의 기억이다.

한국인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은 각별하다. 한국전쟁 후 미군 부대에서 버린 깡통을 재활용해 만들었다는 짠한 탄생 비화가 있지만,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스텐 젓가락'은 같은 젓가락 문화권인 중국인과 일본인도 익숙해지긴 쉽지 않다고 한다. 가늘고 납작해 손에서 잘 미끄러지는 바람에 젓가락질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 음식엔 스텐 젓가락이 안성맞춤이다. 포기김치를 쭉 찢어서 가를 때, 생선이나 고기를 바를 때, 뭉툭한 나무젓가락보다 스텐 젓가락이 훨씬 기능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숟가락이 음식을 옮기는 데 쓰는 조연에 그치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 식탁에서 숟가락은 주연급이다. 젓가락 하나만으론 아무것도 집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식탁에서만 젓가락 옆에 그와 짝을 이루는 숟가락이 놓인다. 국물 요리가 많은 한국 음식의 특성상 숟가락과 젓가락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더기는 젓가락이 맡고, 국물은 숟가락이 맡아 수저가 화합하며 역할 분담을 하는 구도다.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탄생한 포크 숟가락만 열외로 친다면 한국에서 수저는 포크와 칼로 무장한 서양의 식탁보다 훨씬 더 평화롭다는 점도 내세울 만하다.

부산시교육청에서 내년 신학기부터 학교에 수저를 제공한다고 해서 수저의 뜻을 풀어봤다. 현재 전국 17개 시·도 중 학생들이 여전히 수저를 챙겨가야 하는 곳은 부산뿐이다. 637개 학교 중 절반이 넘는 342개교에서 매일 학생들이 수저를 들고 등교한다는데, 그 이유가 식당이 아닌 교실 배식이 많아서란다. 비탈진 곳에 학교가 들어서다 보니 식당 지을 공간이 부족한 탓이란다. 급식용 수저를 제공하면 학교 조리종사원들의 업무 강도가 더 세질 거란 우려도 나온다. 수저에 담긴 화합과 평화의 철학에 맞춰 급식용 수저 문제도 술술 풀렸으면 좋겠다. 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이상헌 논설위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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