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소수의견에 담긴 다수의견
/송시섭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변호사
미국에서 '위대한 소수자'로 불렸던 서굿 마셜 대법관은 변호사 시절 흑백분리교육이 지닌 차별을 종식시킨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을 끌어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연방대법관이 되었다. 그 후 시대를 앞서가는 수많은 판결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설파했으며, 시대가 바뀌어 연방대법원이 보수화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그는 외로운 소수자로서 늘 사회의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 왔다. 그의 삶의 한 단편이 '마셜(Marshall)'이라는 영화로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 속 대사 중 '편견의 문을 지나가는 방법은 부수는 길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그가 죽었을 때 부고장에는 동시대의 거인인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비견되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말콤 엑스를 영화로 만들고, 킹 목사로 인해 휴일을 가지지만, 서굿 마셜로 인해 일상을 살아 간다."
강제징용·양심적 병역거부
대법원 판결 소수의견 주목
다수와 다른 목소리 내기 위해
대단한 용기와 굳은 신념 필요
'용감한 소수자'에 귀 기울여야
진정한 법치국가 이룰 수 있어
지난주 우린 또 다른 의미에서의 '용감한 소수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강제징용 노동자의 신일철주금(구 신일본제철)주식회사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병역법 위반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적은 대법관들이다. 두 판결 모두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내용을 담고 있고 하나는 국제적으로, 다른 하나는 국내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었기에 끝까지 그 결과를 예단하긴 어려웠다. 판결이 폭풍처럼 휩쓸고 간 주말 저녁에 다시 한 번 두 판결문을 조용히 읽어 보았다.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간의 팽팽한 논리적 긴장의 숲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 듯 태풍의 눈 속의 고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번 판결들 속에서는 이전과 달리 다수의견보다는 소수의견에 눈이 갔고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문장 속에서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징용노동자의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두 분의 대법관이 '일본 국가나 기업에 대한 청구권이 소멸이나 포기되지 않은 권리이지만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또 그걸 바꾸지 않았을 경우 쏟아질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야유나 손가락질이 눈에 아른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그걸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깊은 내면의 법적 양심의 소리였을 것이다. 애국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그 길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 결론에의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두 분의 이름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 네 분의 목소리는 한편에선 사법이 입법을 지나치게 선도하는 것에 대한 염려가 깃들어 있고, 다른 한편으론 과연 우리 사회에 이에 대한 명백한 규범적·현실적 변화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교분리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순전히 특정 종교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 속에서 평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에 호소하고 관행 파괴가 일상화되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논리를 지키려는 좋은 의미의 수구의 목소리마저도 대단한 용기와 굳은 신념이 필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기에 우린 그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너무 쉽게 재단하기 전에 내면의 신념을 논리에 담아 우리 시대를 향하여 목소리를 기꺼이 내어준 주인공들을 존경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사상적 배경이 진보든 보수든, 그 당대의 다수의견에 대해 외로운 소수자의 지위를 지키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린 끝까지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다수의견이 역사의 무대에서 박수를 받고 주목을 받는 동안 외로운 소수자의 목소리는 커튼 뒤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다수의견이 다수자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꺼이 소수의견을 선택한 소수자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각각의 소수의견 속에는 그 시대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숨은 다수의견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관대함이 필요하다. 다수의견을 통해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들이나, 소수의견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 모든 대법관에게 박수와 격려를 드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더 큰 시각과 시야를 갖게 될 때 바로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린 진정한 법치국가의 도래, 차별 없는 평등사회의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