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잊힐 권리, 기억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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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변호사

부산을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 '암수살인'의 개봉을 앞두고 피해자 유족 중 일부가 제기한 영화상영금지가처분신청은 그 동안 잠시 잊혔던 '잊힐 권리'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범행 수법과 장소, 시간, 피해 상황 등이 실제 사건과 너무 흡사하여 유족들이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악몽과도 같았기에 이를 재연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이 오갔으나 유족들이 제작사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소송을 취하하기로 함에 따라 예정대로 상영되게 되었다.

정보화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잊힐 권리' 보장은 현재진행 중

인간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
망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어

잊힌 사건 기억해 내는 노력 때
'잊힐 권리' 요구 설득력 가져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는 2010년 스페인의 한 변호사가 자신과 관련된 한 일간지의 기사와 구글의 검색링크가 자신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최종적인 판단을 맡은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신문사의 인터넷 기사를 지우고, 구글에게는 관련 링크를 삭제하도록 하여 개인 정보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라고 판결했다. 그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잊힐 권리'로 대변되는 '프라이버시권'과 '표현의 자유'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진행했다.

판결 이후 구글에는 정보 삭제 요구가 쇄도했고, 2014년 이후 최근까지 구글에 접수된 개인 정보 삭제 요청은 수십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더구나 올해 구글은 국경과 관계없이 온라인상에서의 잊힐 권리 보장을 주장하는 유럽연합(EU)에 맞서 EU 역외국가 주권 침해까지 내세우며 법정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잊힐 권리를 넘어서 국가간 사법권의 충돌까지 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개인정보보호법' 및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는 정보의 삭제 요구 등을 규정해 '잊힐 권리'를 '삭제권(Right to Erasure)' 위주로 입법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최고재판소가 하급심에서 인정한 '잊힐 권리'를 애써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을 법적 권리와 검색 결과로 제공할 제반 사정을 비교 형량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아직도 완벽한 형태로의 '잊힐 권리'의 보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구나 빅 데이터(Big Data)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보와 정보가 연결되어 또 다른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지는 정보의 우주 속에서 개인의 잊히고 싶다는 바람은 '삭제'라는 도구를 통해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가 되고 말았다. 구글의 전 회장 에릭 슈미트의 말대로 '디지털 시대에는 삭제 버튼이 삭제된 것'은 아닐까.

한편 '잊힐 권리'의 이면에는 기억될 권리, 기억될 사람, 그리고 기억될 사건들이 존재한다. 얼마 전 30대의 젊은 검사가 새벽 퇴근길에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근무했던 검찰청에 보낸 편지에서 "부디 그를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아내는 황망하게 떠나버린 남편이 동료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죽음'보다 '망각'이 어쩌면 더욱 슬픈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으리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우린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린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미국 대법관 청문회에서도 '기억'이 주된 쟁점이 되고 있다. 대법관 지명자인 브렛 캐버노 연방항소법원 판사는 눈물과 함께 꺼내 든 자신의 달력을 통해 무고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 사건은 자신의 뇌에 평생 잊히지 않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한 피해자 크리스틴 포드 교수의 진술에 파묻히고 있다. FBI의 조사 결과와 상원의 최종투표가 남아 있으나, 그 결과에 상관없이 두 사람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을 사건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다시 '암수살인'으로 돌아와 보자. 소송 과정에서 다른 유족들은 이 영화를 통해 수사 과정에서 잊힌 사건들이 무대에 다시 올려지길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피해자는 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아 공식적인 범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건부터 수사기관에 알려졌으나 증거 부족 등에 의해 미제로 남게 된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잊힌 사건들을 기억해 내는 작업은 '잊힐 권리'를 포기한 유가족의 또 다른 외침이기도 하다. 어쩌면 '잊힐 권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사건들'과 함께할 때만 설득력이 있다. 이것을 이번 소송은 온전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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