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9. 안동 충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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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 말곤 할 게 없다던데, 영국 여왕은 예서 뭘 했을까?

충효당 안채 전경. ㅁ자형의 안채의 서쪽 날개채는 특이하게도 2층 구조로 돼 있고 동쪽 날개채는 단층으로 돼 있다.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민속 마을이다.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잠시 동북쪽으로 선회해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를 잡은 이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을 꼽으라면 보물인 양진당과 충효당(忠孝堂)을 지목하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류성룡 사후 후손들이 지은 종택
2층 구조의 날개채 등 독특한 형식

'충·효 외 달리 할 일이 없느니라'
시 구절에서 당호 '충효당' 따와

1999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공식석상 첫 맨발 보인 이야기 유명

■서애 류성룡 후손들이 건립

충효당(보물 제414호)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택이다. 하지만 현재 충효당은 서애 생존 시에 지은 집이 아니다. 서애는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선생이 30여 년간 머물렀던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매우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기거하다가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별세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가 별세한 뒤 일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유림의 도움을 받아 선생의 맏손자 졸재 류원지가 안채인 내당을 지었고, 그의 아들 눌재 류의하가 사랑채인 외당을 지어 확장했다. 대문간채는 선생의 8대손인 일우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갑자기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지었다고 한다.

미수 허목의 글씨인 충효당 당호 현판.
충효당은 대문간채가 전면에 독립된 점과 사랑채가 안채의 앞쪽에 연결돼 옆으로 길게 나온 점이 독특한 구조다. 안채와 사랑채는 남쪽으로 약간 치우치는 서향을 했고, 사당은 방향을 틀어 남향하고 있다. 당호를 '충효당'으로 한 것은 서애가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남긴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느니라(忠孝之外無事業)"라는 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서쪽 날개채 2층 구조 독특

대문간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서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랑채는 겹집 형태의 평면을 이룬다. 정면과 측면으로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보인다. 
충효당의 장독대.
사랑채는 세월의 멋이 느껴지는 소나무의 오래된 나이테와 잘 다듬은 장대석의 축대가 인상적인데, 특히 궁궐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던 장대석을 계단 디딤들로 놓아 멋스러움과 함께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충효당 사랑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에 걸린 '충효당' 당호 편액은 서애의 증손자인 류의하 때 미수 허목(1595~1682)이 전서로 쓴 것이다. 허목이 쓴 글을 걸어놓은 집은 불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 충효당은 지금껏 한 번도 화마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편액 아래에는 띠살문을 달아 뒤뜰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사랑채 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간다. 안채의 평면 형태는 중앙에 안마당을 두고 건물을 둘러 배치한 ㅁ자형으로 경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사방의 건물들은 각각 7칸 규모로 안마당을 둘렀다. 
충효당 안채 두리기둥.
안채 정침에서 안방 오른쪽에는 정면 2칸 크기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공간이 ㅁ자형의 구조가 주는 답답함을 해소한다. 이 외에도 대청을 포함한 정침에 세워진 높다란 두리기둥은 시원함을 주는 동시에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서쪽 날개채는 특이하게도 지붕이 높은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아래층은 찬방·헛간·방이 각각 1칸씩 배치돼 있고, 위층에는 곳간 겸 다락이 설치돼 있다. 동쪽 날개채는 단층 구조다. 동쪽 날개채를 단층으로, 서쪽 날개채를 다층으로 설계한 것은 폐쇄적인 구조의 안채에 뜨는 해의 기운을 많이 담고 저녁 무렵의 일사량이 많은 열에너지를 가급적 피하고자 한 결과물로 보인다.
충효당 비오는 안채.
안채 동쪽 편 박공벽에는 기와를 이용한 아름다운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수키와로 안고 덮어 쌓고 그 위에 '쌍 희(囍)'자를 표현하고, 한쪽에는 눈을 질끈 감은 얼굴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집안에 항상 기쁜 일만 있기를 기원하는 동시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눈 감고 기다리면 화목과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염원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사랑채를 오른쪽으로 돌아 뒤로 가면 기와로 겹겹이 쌓아 올린 담장 안으로 사당이 보인다. 사당은 일반적인 사당 건축 양식인 삼문의 문과 3칸의 맞배지붕 재실을 뒀다. 삼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불천위로 모시는 서애와 4대조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사당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커다란 문과 높이 세운 추녀가 사당 전체에 장중함이 흐르게 한다.

사랑채 뒤 넓은 후원에 ㄱ자 형태로 서 있는 건물이 영모각(永慕閣)이다. 영모각은 서애의 문물·유품을 수장·전시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1976년 개관했다. 영모각 앞에는 만지송(萬指松)으로 불리는 큰 소나무가 서 있어 집안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신발 벗고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

충효당 대문 앞 잔디밭에는 잘생긴 구상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해 심은 것이다. 구상나무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 고유 수종으로 소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수다.
1999년 충효당을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때 일화다. 여왕은 충효당 안방으로 안내를 받아 처음에는 마루에 신을 신은 채 올라갔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갈 때는 신을 벗는 것이 한국 생활방식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서양에서는 맨발을 보이는 것이 알몸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여겨 실내에서조차 신을 벗지 않는데, 충효당을 방문한 여왕은 한국 풍속과 예절을 따랐다. 여왕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을 보인 것은 충효당 안채에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서애의 16세손 류창해 선생.
충효당에는 서애의 16세 종손 류창해(62) 선생이 부인 이혜영(58) 여사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2014년 부친 별세 이후 대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유 선생의 모친(90)은 경주 최부자집 둘째 딸이다. 첫째 딸은 거창 정온 선생 가에 시집갔음을 이 난에서 이미 보도한 바 있다.

선생은 "2015년 10월 문중 친척과 일반인 등 1000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길사(吉祀)를 올렸다"면서 "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지만, 조상을 잘 모시고 집안이 번창하도록 종손 역할을 최대한 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편 충효당은 옥연정사 고택 체험(숙식)을 하고 있다. 옥연정사는 서애가 징비록을 구상하고 작성한 장소로, 낙동강 건너 부용대 왼쪽 기슭에 자리해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고택 체험 문의 054-854-2202.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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