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옥산서원] 단정히 선 누각·사뿐히 올려진 추녀… 꼿꼿함이 예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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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변루에서 바라본 구인당과 왼쪽의 동재, 오른쪽의 서재 등 강학공간. 구인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살짝 들어 올려진 추녀의 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경북 영천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안강읍에 조금 못 미쳐 북쪽으로 옥산서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1㎞가량 들어가면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이 나온다. 왕복 2차로 포장길이지만, 길 양쪽으로 볏논이 펼쳐지고 송림이 우거져 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글의 순서가 뒤바뀐 셈이지만, 사실 독락당에 가기 전에 옥산서원을 먼저 들러 회재의 삶과 사상을 대략 알아보는 것이 독락당 탐방에 도움이 된다.

회재 이언적 성리학 연구 기리려
타계 이후 유림들 뜻 모아 창건

역락문·무변루·구인당·체인문 등
서원 건축물 긴장·절제 돋보이고

자계천 계곡물 세심대선 폭포로
우렁찬 소리에 마음마저 청정

■성리학사에 빛나는 업적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은 회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됐다. 그가 타계한 지 19년 뒤인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2년 뒤에는 퇴계 이황 등의 노력으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옥산서원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과 사당 중 하나다.

이 기회에 회재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회재는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해 관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정치적 경륜보다 학문적 영역에서 더욱 빛났다. 27, 28세 무렵 망기당 조한보와 네 차례에 걸쳐 벌인 '태극무극논변(太極無極論辨)'은 그의 학문적 명성을 일거에 높이는 계기가 됐다. 여기서 개진된 회재의 학설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이단의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리학 정통 확립에 의미 있는 것이었다.

회재는 41세 되던 1531년 당시 실력자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산의 한 시냇가에 서재 겸 별장 격인 독락당과 정자 계정을 경영하며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런 연유로 그의 사후 독락당에서 700m가량 떨어진 곳의 자계천 건너편에 옥산서원이 창건됐다.

회재는 47세 때 7년 가까운 은거 끝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길을 나서지만, 을사사화와 2년 뒤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파직된 후 평안도 강계로 유배된다.

유배는 정치가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학자로서는 귀중한 기회였다. 회재는 유배 생활 6년 동안 <대학장구보유> <속대학혹문> <중용구경연의> <구인록> <진수팔규> 같은 빛나는 저작들을 완성했다.

학생들 휴식공간인 무변루.
■무변루, 폐쇄와 트임의 미학

옥산서원은 서향인데, 동서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에서 정면인 서쪽 앞에 마주 보이는 산은 무학산이고 북쪽은 자옥산, 뒤쪽은 화계산이다. 이 서원은 틀에 짠 듯한 질서정연한 형식을 보인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이 서원의 원규(학칙) 만큼 건축물들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선다. 역락문은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멀리서 친구가 있어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子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역락문 앞으로는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가 앞을 막아서는데, 그사이에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이 내는 맑은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다. 공부하는 선비들이 이 물로 심신을 씻고 청정함을 유지하라는 뜻이겠다.

무변루는 학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정면 7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다. 그 밖에 좌우 각 한 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돼 있다. 2층 누마루에 서면 서원 앞 처마 사이로 강당과 마당이 시원하게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앞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무변루 대청 바깥쪽으로는 벽체를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폐쇄적인 공간 처리를 하고 있는 반면 강당 쪽으로는 창호를 달지 않고 트이게 했다. 아마도 자계천 물소리 등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감독 기능을 강화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강당 건물인 구인당(求仁堂)과 그 앞 좌우의 동재(구재)와 서재(암수재)가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구인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고,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벽 뒤에 붙은 옥산서원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한호 한석봉이 썼다.
관솔불을 밝히던 정료대.
구인당은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이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양진재와 해립재가 있다. 마당에는 관솔불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가 꼿꼿이 서 있다.

구인당 마루에 앉아 위를 쳐다보면 사뿐히 들어 올려진 추녀의 선이 매우 아름답다. 구인당에서 바라보면 앞마당을 가로질러 무변루 위로 멀리 무학산이 눈에 들어온다. 구인당의 '구인'은 성현의 학문이 오로지 '인'을 '구'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의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세심대서 마음을 씻다
한호 한석봉 글씨인 '옥산서원' 편액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자계천의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 탁영대, 세심대, 징심대, 영귀대라고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 옆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세심대와 관어대.

서원을 나오면 30여m 앞에 자계천의 맑은 물이 흘러간다. 자계천 옆으로 족히 900㎡는 될 법한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고 수직 바위에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독락당 옆에서는 얕고 느린 흐름을 보이던 계곡물이 세심대 앞에 이르러 급격하게 떨어져 내리며 폭포를 이루고 폭포는 시간의 흔적으로 깊은 소를 남겼다. 소의 푸른 물빛으로 봐서 예사로 깊어 보이지 않는다. 계곡을 양쪽을 가둔 바위들은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처럼 단정하고 두껍다. 이곳에선 계곡물조차 책을 읽으며 흘러간다는 뜻인가!
세심대 앞에 이르러 소를 이루는 자계천.
너럭바위에 앉아 우렁찬 폭포 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의 때가 절로 씻겨져 나가는 것 같다.

계곡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독락당으로 가기 위해서다. 비 온 뒤라 바람이 선선하고 산 어깨쯤으로 구름의 흐름이 여유롭다. 옥산서원에서 독락당까지는 약 700m. 차가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이라 여유롭게 농촌의 가을 들녘을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석류가 빨갛게 물들었고 단감도 알이 제법 굵다. 조생종 벼는 벌써 누렇게 익었고 해바라기는 오로지 해만 쳐다보다 지쳤는지 고개를 숙였다.

한편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변에는 국보 제40호 정해사지 13층 석탑과 각종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는 세심마을이 있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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