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이'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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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보스턴은 이미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ve)'라고 외쳤던 깨인 지역이었다.'

원문까지 착실히 인용한 이 글은, 단어 하나 잘못 쓰는 바람에 힘이 빠져 버렸다. 아래 글도 마찬가지.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공통된 잘못은 '깨인'이다.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사리를 가릴 수 있게 되다'라는 말은 '깨이다'가 아니라 '깨다'이기 때문이다. 깨이다는 '(잠을)깨다'의 피동사(잠이 깨이다)일 뿐이다. 우리 말글살이에서 이처럼 사동이나 피동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를 잘못 덧붙여 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개이다→개다(맑게 개인 날→맑게 갠 날)

*닿이다→닿다(타이어가 지면에 닿이는 부분→지면에 닿는 부분)

*데이다→데다(불에 데인 것 같은 통증→불에 덴 것 같은 통증)

*메이다→메다(목이 메이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목이 메는지…)

하지만, 너무 자책할 건 없다. 말글 전문가들조차 틀리기도 하니까. 아래는 어느 실용글쓰기 전문강사가 인터넷 매체에 쓴 글 제목인데, '밴'을 '배인'으로 잘못 썼다.

<메모습관 배인 당신이 글을 잘 못 쓰는 이유>

어느 신문에 실린 아래 칼럼에서는 '기댐'으로 써야 할 것을 '기대임'으로 썼다.

'이렇듯 서로 '기대임'으로 모든 있음이 생기는데 만약 기대는 대상이 없어져 버리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이든 찾아서 갈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욕망이다.'

우리말에 '기대이다'라는 동사는 없다.(북한에서는, '기대이다'로 쓴다.) 아래는 어느 신문 제목.

<깎이고 패이고…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지질 보물창고>

<푹 패인 빙상장서 심야훈련하는 부산 컬링 미래>

하지만, '파이다'의 준말이 '패다'이므로 '파이고/패고'나 '파인/팬'으로 써야 한다.

'이 도로가 침식되면서 움푹 패여 도랑 역할을 해 상류 재약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습지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방해했다.'

역시 같은 신문 기사인데, 딸린 사진설명에도 '움푹 패인 고산습지'라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실수는 아닌 모양이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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