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2주년 특집-72번길에서 만난 사람들] "낮은 곳, 작은 목소리 계속 귀담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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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점자도서관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애인 인식 개선을 당부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부산일보의 모든 이야기는 길 위에서 시작한다. 72년간 기자들이 길 위에서 보고 들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는 부산일보의 역사이자, 부산의 역사가 됐다. 본보는 창간 72주년을 맞아 부산의 72번길 위에서 이야기를 듣고, '부산일보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72번길에서 만난 이들은 "72년간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낮고, 작은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줄 것"을 주문했다.

사상구 덕상로 '부산점자도서관' "부산일보가 장애인 인식 개선 앞장서 주길"

대중교통으로 부산 사상구 덕상로72번길을 가기 위해선 도시철도 2호선 모덕역 2번 출구로 나와 공장지대를 지나고 철길 굴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부산점자도서관'이 있다. 비장애인도 쉽게 오가기 힘든 이곳으로 1급 시각장애인 안익태(48) 씨는 매일같이 출근한다. 도서관 사무국장을 맡은 안 씨는 "근무한 지 8년이 지났지만 혼자 다니기엔 위험해 비장애인 직원과 함께 다닌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자립 생활을 하는 시각장애인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이곳을 찾아오기란 '위험한 도전'과도 같다. 공장 앞에 무질서하게 놓인 불법 주정차 차량과 도로 위를 오가는 지게차, 공장의 기계음들은 주변 지형지물과 청각에 의존해 길을 찾는 시각장애인들이 방향 감각을 잃게 한다. 몇 년을 오가더라도 시각장애인에게 이 길은 낯선 셈이다.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철도 역에서 도서관까지 셔틀버스를 제공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탓에 올 상반기 온·오프라인 이용객은 163만 명인 데 반해, 방문객은 하루 평균 10명 안팎에 그친다. 이용객 대부분은 우편 서비스를 이용해 책이나 자료를 받아보는 실정이다.

시각장애인이 이용하기 편하고, 책을 더 많이 보관할 수 있는 넓은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요구도 잇따른다. 독립된 점자도서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현재 사상도서관과 붙어 있다 보니 시각장애인에게 길을 안내하는 '차임벨'이 시끄럽다는 민원이 종종 제기된다. 음악 관련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려 해도 도서관 휴관일에 맞춰 해야 한다는 한계가 따르는 실정이다. 안 씨는 "사상구 덕포동에 생길 부산도서관으로 점자도서관을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해 봤지만,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 씨는 부산의 정책들이 점점 좋아지지만, 좀 더 섬세한 부분에서 장애인을 배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안 씨는 "사회 참여를 원하는 시각장애인이 많은데 부산시의회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는 시각장애인 서비스가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여전히 공공기관의 장애인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면서 "늘 그래왔듯이 부산일보가 이런 인식 개선에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산진구 안창로 '안창마을' "경로당 사각지대 사연 더 다뤄 줬으면"

안창마을 주민들이 부산 부산진구 안창로72번길 안창마을 통합회관에서 활짝 웃고 있다. 서유리 기자
부산진구 범천 2동 22통과 23통 주민이 모인 안창로72번길에는 그 흔한 '경로당' 하나 없다. '안창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하나의 마을이지만, 호계천을 중심으로 부산진구 범천동, 동구 범일동으로 행정구가 나뉘었다. 이렇다 보니 한마을 안에서도 주소에 따라 주민들이 받는 혜택은 천차만별. 안창마을 통합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설움의 세월을 쏟아냈다.

고순옥(79) 할머니는 "독거노인에게 제공되는 도시락도 부산진구 주민은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안창마을은 부산진구에서 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호소했다.

할머니들은 '경로당'에서 가장 큰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현재 통합회관이 경로당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미등록 경로당이다 보니 지자체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이곳 할머니들은 기초연금에서 모아둔 쌈짓돈을 조금씩 모아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있다. 그나마 2014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일환으로 통합회관이라도 생긴 덕에 쉴 곳이 마련됐다.

마을의 노령화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주민들이 20년 넘는 세월 동안 경로당을 설립을 요청했지만,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해 왔다. 참다 못해 올 7월 통합회관을 정식 경로당으로 인정해 달라는 서류를 제출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마을의 살림을 도맡은 사무국장 김광순(58·여) 씨는 "부산일보가 이런 사각지대가 없도록 샅샅이 돌봐주고, 약자의 목소리에 계속 귀 기울여 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금정구 수림로 '구서1동 주민센터' "복지 패러다임 변화 주도적 역할 기대"
박상민(왼쪽) 할아버지와 이명애 사회복지사가 부산 금정구 수림로 72번길 구서1동 주민센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서유리 기자
지난 7일 부산 금정구 수림로72번길 구서1동 주민센터를 찾은 박상민(77) 할아버지는 직원들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팡이를 짚고 느린 걸음으로 이곳을 찾은 박 할아버지는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15년 전 갑작스레 왼쪽 몸에 마비 증세가 찾아오면서 말하기가 버거워지고,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뇌병변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넉넉지 않던 생활에 병까지 찾아오자 박 할아버지는 더욱 암울해졌다. 집도 없이 여관방을 전전하며 살아가다 한때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던 그였다.

주민센터는 올 6월 여관에 장기 투숙하던 박 할아버지를 사례관리 대상자로 선정했다. 처음엔 주민센터의 도움마저 거부했지만, 주민센터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그는 올 7월 여관살이를 끝내고 저렴한 전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민센터에서 내민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생활도 덩달아 바뀌기 시작했다. 생기를 되찾은 박 할아버지는 주민센터에 들러 책을 빌려 가기도 하고,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구서1동 주민센터 박서인 복지팀장은 복지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박 팀장은 "시혜적이고 일시적인 복지보다 사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부산일보가 계속 앞장서 주길 기대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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