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소쇄원·명옥헌] 청량한 바람·맑은 달빛 품은 '선비들의 정원'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조화로운 자연미와 인공미를 느낄 수 있는 소쇄원. 앞 건물이 광풍각이고 뒤쪽이 제월당.

맹렬하던 무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새삼 실감한다. 아침나절로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쳐온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콧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가진 것 없어도 시원한 바람 하나로 행복해지는 호시절이 눈앞이다.

날이 선선해지면 소쇄원(瀟灑園)을 찾아가 보리라던 오랜 다짐을 실행에 옮긴다. 몇 년 전 우연히 들른 뒤 소쇄원의 계곡 물소리와 댓잎 서걱대는 소리, 제월당과 광풍각 그리고 흙돌담의 풍치가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물 맑을 소 깨끗할 쇄, 소쇄. 소쇄원은 한 번만 입소리를 내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묘한 울림이 있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는 곳이다.

조선 대표 민간 정원 '소쇄원'
기묘사화 때 스승 죽음에 충격
양산보, 낙향 후 여생 보낸 곳
'오곡문' 신묘한 건축술 눈길
숱한 시인·묵객 소쇄원 칭송
김인후 '사십팔영' 널리 알려져

오명중이 꾸민 '명옥헌' 정원
배롱나무꽃 절경 매력적
갖가지 색의 향연 감탄 자아내

계류 위에 돌기둥을 쌓아 만든 오곡문.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명승 제40호)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한국의 대표적 민간 정원이다. 소쇄원은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는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충격을 받아 벼슬에 뜻을 접고 낙향해 소쇄원을 지었다.

양산보는 자손들에게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 돌 하나 계곡 한구석이라도 내 손길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했다. 이런 연유로 소쇄원은 지금도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돼 있다.

매표소를 통과해 소쇄원 안으로 들어간다. 길 양쪽의 빽빽한 대숲이 햇살을 차단해 갑자기 어둑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숲이 일렁이며 서늘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150m쯤 들어가자 '소쇄원' 이정표가 나오고 왼쪽으로 제법 깊은 계곡이 흘러내린다.

소쇄원 입구에는 ㄱ자형의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대봉대(待鳳臺)'. 띠집으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이 지은 정자다. '봉황새를 기다리는 곳'이라니. 스승 조광조 같은 큰 인물이 나라를 경륜하는 날을 고대하는 양산보의 마음이 읽힌다.

대봉대와 길을 사이에 두고 50m가량의 흙돌담이 고풍스러운 멋을 뽐낸다. 담 위에는 애양단(愛陽壇)이란 글자가 붙어 있다. 애양단은 겨울에 북쪽에서 내원으로 몰아치는 찬바람을 차단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특히 애양은 애일(愛日)과 같은 말로,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을 이른다. 양산보의 효심이 투영된 공간이다.

애양단 옆 담에는 오곡문(五谷門)이 붙어 있다. 소쇄원 담장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는데, 계류 위에 담장을 쌓기 위해 중간에 교각 삼아 돌기둥을 쌓아 놓은 곳이 바로 오곡문이다. 담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기둥은 보기에 아슬아슬하지만 500여 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니, 신묘한 건축술이 놀랍기만 하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소쇄원 내원이다.

내당인 제월당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으로 2단의 화단을 쌓아 매화나무를 심었다. 매대(梅臺)라고 부르는 곳으로, 양산보와 선비들이 이곳에 올라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그 위쪽 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로 뒤쪽에는 이 원림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제월당(霽月堂)이 서 있다. 제월당은 사랑채와 서재 용도다. 그 아래 계곡 가까이에는 광풍각(光風閣)이 서 있다. 광풍각은 손님을 맞이하던 장소다. 제월당과 광풍각 이름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흉회쇄락 여광풍제월'이라고 한 데서 따온 명칭이다. 이 말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다'는 뜻이니, 양산보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작명이 아니겠는가.
띠집으로 소박하게 만든 대봉대.
■시인 묵객들 시 헌사

소쇄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당시에도 숱한 시인 묵객들이 자자하게 칭송한 바 있다. 송순, 정철, 백광훈, 고경명, 김인후 등 당대의 명유·명문·명류들이 소쇄원을 찬양한 시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四十八詠)이 잘 알려져 있다. 사십팔영은 제월당 벽에도 쓰여 있다.

양산보와 사돈지간이었던 김인후는 48가지 제목으로 소쇄원을 노래했다. 선명한 회화적 이미지와 단축미가 돋보이는 김인후의 시를 읽노라면 마치 수백 년 전 소쇄원 풍경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이 시들은 소쇄원 원래의 건축학적 구조와 의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예컨대 제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을 읊어 보자. '창 밝으니 방 안의 첨축들 한결 깨끗하고/맑은 수석엔 책들이 비춰 보이네/정신 들여 생각하고 마음대로 기거하니/오묘한 계합 천지조화의 작용이네'

대봉대에서 계곡 아래로 건너다보이는 집이 광풍각이다. 광풍각 주춧돌이 자리한 토방 아래엔 굽이진 계곡이 있어 물이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흐르는 시내를 베개 삼아 지은 집, 이것이 침계이고, 공부하는 글방이 곧 문방이다. 번거로운 속세를 멀리하고 산수가 빼어난 이곳에서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던 선비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명옥헌 아래 연못가의 배롱나무꽃과 녹음이 어우러진 절경.
■명옥헌 원림

남도 지방으로 내려가면 배롱나무(목백일홍)가 한창 물이 올랐다. 담양 땅 곳곳에도 배롱나무의 붉은 향연을 볼 수 있다. '꽃의 춘궁기' 여름, 사람들은 100일 동안 피고 지는 배롱나무꽃을 보면서 한여름 무더위와 무료함을 견뎌내는지도 모른다. 명옥헌(명승 제58호)은 배롱나무꽃의 절경이 매력적인 원림이다.

고서사거리에서 창평 방향으로 826번 지방도를 타면 얼마 안 가서 오른편에 '명옥헌 정원 입구'라고 쓰인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오른쪽 마을 길로 들어가면, 묵은 팽나무가 동구를 지키는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이 나온다. 명옥헌은 이 마을 안쪽 산 아랫자락에 있다.

명옥헌 정원은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 아래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서향으로 앉은 정자로 이뤄져 있다.

동그란 섬을 품고 동서로 20m, 남북으로 40m 되는 사각형 아래 연못 주변으로 오래된 배롱나무가 빙 둘러섰다. 배롱나무들은 연한 분홍에서 진분홍을 거쳐 보라에 가까운 분홍까지 절정에 이른 색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못의 서남쪽 가에는 늘씬한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줄지어 섰고 그 사이로 멀리 무등산이 언뜻 보인다.
소쇄원의 풍치를 노래한 시.
이곳을 꾸민 사람은 이정 오명중(1619~1655)이다. 그의 아버지 오희도(1584~1624)는 외가가 있는 이곳에 와 살면서,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오희도는 인조반정 후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기주관이 됐으나 1년 만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652년 무렵에 넷째 아들인 오명중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명옥헌과 못을 만들고 배롱나무를 심었다.

한편 명옥헌 근처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300년 이상 된 노거수로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매둔 곳이라고 한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