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스크린 산책] 어른도감
남남에서 동거인·동료로 변해 가는 삼촌과 조카 사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듯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의 제목처럼 '어른이지만 아이입니다'라거나 '어른이지만 어른은 아닙니다'라는 말도 의미상 모순이 아닐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나이를 많이 먹고도 자기 일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과 몸은 다 자라지 않았어도 제 앞 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뒤섞여 살고 있다. '어른도감'(감독 김인선)은 바로 그런 이들이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열 네 살 '경언'(이재인)은 혼자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남자, '재민'(엄태구)이 영구차에 타더니 오열을 한다. 그는 경언에게 자신을 삼촌이라 소개하며 당분간 경언을 돌봐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삼촌과 조카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슬쩍 부의금과 형의 사망 보험금에 대해 물어보던 재민은 결국 돈을 가로채 자신의 빚을 갚는데 쓰고, 경언은 빨리 돈을 갚으라고 닦달한다. 그러자 재민은 자신의 사기 행각에 경언까지 끌어들인다. 두 사람이 돈 많은 약사 '점희'(서정연)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삼촌 역 엄태구, 조카 역 이재인
각자의 캐릭터 매력적으로 형상화
엄밀히 재민은 사기꾼, 그것도 형의 사망 보험금을 조카로부터 가로챈 악질이며, 돈을 갚겠다는 명분으로 조카를 사기에 끌어들이는 개념 상실의 철부지다. 부유한 싱글 여성에게 접근해 돈을 뜯어내겠다는 발상부터가 구식이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이 몸만 자란 남자가 밉지 않다. 아이큐 143에 매사 똑 부러지는 경언이 삼촌의 사기를 돕고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관객들도 점차 재민의 엉뚱한 면모와 해맑은 미소에 무장해제 당한다. 경언도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머리 좋은 아이'로 등장했던 다수의 캐릭터들과 달리 되바라지거나 사납거나 약삭빠른 데가 없다. 뭐든 알아서 잘 할 아이인데도 가끔씩 보이는 경언의 어두운 얼굴은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재민과 경언 역을 맡은 배우 엄태구와 이재인은 각자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형상화해냈을 뿐 아니라 생면부지의 남남에서 동거인으로, 다시 동료로 변해가는 삼촌과 조카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보기 드문 조합의 버디무비다.
김인선 감독은 경언과 재민의 관계 발전과 그들이 점희를 끝까지 잘 속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면서 서사를 탄탄하고 흡입력 있게 끌어간다. 장르영화와 달리 영화 안에서 매듭지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산 밑을 내려가는 삼촌과 조카의 뒷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면이 너무도 만족스런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