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인근 가 볼 만한 곳] 명문가의 기록 정신·명품 고택·지리산의 '시크릿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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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재는 구례의 '숨은 보물'이다. 개방성이 뛰어난 고택일 뿐만 아니라 쌍산재로 오르는 숲길이 그윽하고 아름다워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터를 잡은 류이주는 경북 해안면 입석동(현 대구 동구 입석동) 출신이다. 류이주는 1753년(영조 29년) 무과에 합격해 낙안군수, 삼수부사 등을 거쳐 훗날 정일품에 봉해졌다. 만년에 구례로 돌아와 몸을 낮추고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실천
10세손 거치면서 성했던 가문

■운치 넘치는 류이주 영정


운조루 류씨 가문이 류이주 이래 10세손을 거치면서 가운(家運)이 기울지 않고 성했던 것은 '타인능해'의 목독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이웃을 배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집안의 자랑거리가 바로 '기록 정신'이다.

운조루에서 나와 벼가 한창 자라고 있는 논을 곁에 끼고 남서쪽으로 200m쯤 걸어가다 보면 운조루 유물전시관이 나온다. 이 집안의 유물들을 온전히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2016년 4월 문을 연 전시관은 5905㎡의 터에 총면적 886㎡ 규모로, 전시실 1동과 주차장, 부대시설로 구성돼 있다. 유물 수백 점 가운데 일반인이 관심을 둘 만한 100여 점을 우선 전시하고 있다.

운조루 7대 주인인 류형업의 시를 모아 놓은 <옥석시고>.
전시실 입구에는 운조루 헛간에서 본 '타인능해' 목독이 실물 크기로 놓여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상기한다.
매천 황현이 운조루의 풍광과 정취 를 노래한 칠언시.
이어 '귀만와(歸晩窩)' 현판과 류이주·류덕호·류영무 호패가 보인다. 류이주는 처음 이사 와 살았던 구만들(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萬)이라 했으며 운조루의 처음 이름은 귀만와였다고 한다. 운조루 풍광과 정취를 노래한 매천 황현의 칠언시와 류이주의 현손 류제양(1846~1922)의 '이산시고(二山詩稿)'가 나란히 놓여 있다. 류제양은 구한말과 일제 치하에서 운조루의 유물을 잘 간수한 주인으로, 구례 지역 인사들과 교류하며 이산시고를 남겼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삼수공 류이주 영정.
큰 사랑채 누각에 앉은 류이주의 영정에 각별히 눈길이 간다. 아이를 안고 마른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정원을 바라보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작자는 미상이다. '전라 구례 오미동가도'는 1800년대에 그려진 운조루 전경으로, 운조루의 처음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운조루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전라 구례 오미동가도'.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대를 이어온 기록 소중하게 보존

■시대상 잘 보여 주는 시언·기어


류이주가 집터를 닦을 때 현재의 부엌 터에서 나왔다고 하는 돌 거북이 놓여 있다. 길이 25㎝, 높이 12㎝, 머리 3.5㎝의 이 돌 거북으로 인해 운조루 집터를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원래 돌 거북은 1989년에 도둑을 맞아 복제품을 놔뒀다.
금귀몰니 터를 입증하는 돌 거북.
운조루의 소장 문서 가운데 일기류인 시언, 기어, 농가일기, 전가일기, 향촌문서 등은 가정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회·경제적 변화, 농업 경영 등 농촌 생활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시언(是言)'은 류제양의 친필 일기. 1851~1922년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 총 7권 5책으로 이뤄져 있다. 구한말 서구 문물 유입과 그에 따른 위기감, 농촌사회 변화 등이 기록돼 있다. '기어(紀語)'는 류제양의 손자 류형업(1886~1936)의 친필 일기. 1896~1936년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 총 38권 31책이다. 류제양은 시를 많이 썼지만, 류형업은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래서 기어는 대한제국 패망과 3·1운동, 지적 측량, 신식학교제도 등 근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배움의 습관과 이웃에 대한 배려심, 나라에 대한 충성심 등이 누대에 걸쳐 쌓여 마침내 가문의 꽃을 피우는 게 아닐까. 이와 더불어 기록 정신이야말로 명문가의 필요조건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입장료는 무료. 061-782-2432.

■금환낙지의 곡전재
오미리에는 아름다운 고택이 또 하나 있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에서 남쪽 길로 200여m쯤 내려가면 곡전재(穀田齋)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다.

이 집은 1929년 '7000석 부호' 박승림이 10여 년간 명당을 찾다가 발견한 터에 건립했으며 1940년 곡전 이교산 씨가 인수해 현재 증손자 이병주(64) 씨가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 목조건축 양식의 주택으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게 특징이다. 특히 높이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해 집터 환경을 금환(金環) 개념으로 조성한 점도 독창적이다.

곡전재는 풍수지리 때문에 물길을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물은 지리산 자락에서 발원한 물이라고 한다. 춘해루 옆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다. 안채로 돌아 들어가면 널찍한 안마당이 넉넉함을 선사한다.

곡전재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명품 고택으로 지정받아 고택 체험 민박을 제공하고 있다. 문의 061-781-2532.

대나무·차나무·동백나무 군락…
지리산 자락의 보물 같은 고택

■정원이 아름다운 쌍산재


구례 여행에서 쌍산재(雙山齋)라는 고택을 놓쳐선 안 된다. 사도리 상사마을에 있는 이 집은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돼 있지 않지만, 한번 들어가 본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는 '시크릿 가든'을 자랑한다. 쌍산재는 현재 주인장 오경영 씨의 고조부 오형순이 지은 것으로 5대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마침 주인장 오 씨가 집에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 씨는 "우선 집 뒤를 한 바퀴 돌고 오세요"라며 숙제를 내듯 한 마디 툭 던진다.

겉으로 봐선 여느 고택과 다를 게 없다. 사랑채와 안채를 대강 둘러본 뒤 집 뒤 숲속으로 올라간다.

경사진 숲길을 천천히 5분가량 올라가면 비로소 시크릿 가든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좁다란 숲길 양옆으로 대나무(왕대)가 서걱대고 키 작은 차나무가 자라고 있어 한낮인데도 어둑하고 서늘하다. 조금만 올라가면 길 양쪽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잔디밭을 지나고 차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지를 거치면 이 집의 보석 '쌍산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쌍산재는 일종의 서당으로 이 집안 선조들이 글을 읽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생활공간인 사랑채·안채와 동떨어진 숲속에 공부 공간을 별도로 둔 경우는 일반 고택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다.

쌍산재 옆에 있는 호서정에 들러 잠시 앉았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좁은 숲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한 사람이 지나갈 크기의 영벽문(映碧門)이 나온다. 이 문을 열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지리산 맑은 물을 품은 사도저수지가 일렁이기 때문이다.

오경영 씨는 15년 전 쌍산재의 개방을 결정했다. 대부분 고택이 개방되기 시작한 게 불과 5~6년 전이고 보면 오 씨의 개방은 모험에 가까웠다. "이대로 뒀다간 집이 허물어지겠더라고요. 집은 사람이 찾아야 집다워진다는 생각으로 개방하게 됐죠."

지리산 자락에 안긴 쌍산재는 주인의 선한 마음과 예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온갖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한데 어우러져 찾는 이들에게 묘한 흥분과 편안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 집에서 하룻밤 묵으며 숲의 바람과 새소리를 듣는다면 여행의 피로를 씻기에 이보다 더 좋을 건 없을 듯. 숙박 문의 061-782-5179.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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