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부자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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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낮에는 폭염(최고 기온 33도 이상), 밤에는 열대야(최저 기온 25도 이상)가 번갈아 찾아든다. 문제는 '올여름만 견디면 된다'고 낙관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구온난화로 여름 더위가 해를 거듭하며 기승을 부린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계절 요인이 큰 만큼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여물지 아니하여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울 때를 일컫던 보릿고개가 연상된다. 농경시대 4~5월 춘궁기가 가장 무서웠다면, 이제는 7~8월의 '더위 고개'가 가장 무서운 세상이 됐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더위 구제'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다. 집마다 여름 필수품이 된 에어컨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전기요금을 낮춰야 한다는 여론이 많지만, 정부의 대응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기만 하다. 가정용 전기에 요금 폭탄을 안기는 누진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씨도 안 먹히는 분위기다. 보릿고개 시절의 경주 최 부자 집이라면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아마 '사방 백 리 안에 더워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로 바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는 가훈을 남기기도 했던 경주 최 부자 집은 만석꾼이었다. 곡식 만 섬가량을 거두어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큰 부자였다. 당시에는 논밭이 재산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기에 천석꾼, 만석꾼으로 불리는 지주, 대지주는 지역과의 끈끈한 유대 속에 부를 대물림하기 일쑤였다. 경주 최 부자 집은 12대 만석꾼으로, 지역의 존경과 칭송 속에 400년간 부를 누렸다. 자본이 토지보다 우위를 차지한 오늘의 자본주의 시대에는 과거 지역마다 있었던 큰 부자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KB금융경영연구소의 '2018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부자가 27만 8000명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2013년 이래 부자 수는 매년 10%대 성장률을 보이며, 1인당 평균 23억 2000만 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에 사는 부자가 12만 2000명으로 전체의 43.7%를 차지했고, 경기(21.3%), 부산(6.6%)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한국 부자의 65%가 수도권에 몰려 있는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부자마저 특정 지역에 쏠려 있으니 이래저래 한국의 여름이 덥기만 하다. 임성원 논설위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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