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신발 100년, 세계를 뛴다] 부산 신발 '미래 동력'을 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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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우리나라 첫 고무신 공장인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창업자 이하영 씨는 부산 기장 출신으로 일본산 고무신이 품귀 현상을 겪는 것을 보고 한국신발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올해 8월 1일은 신발산업을 알린 지 햇수로 100년 되는 날이다.

신발산업의 첫발은 서울에서 시작됐지만 창업자의 출신도 산업을 꽃피운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에서 '신발 빅 6' 태동
생산기지로 호황 누렸지만
저가 경쟁서 밀리면서 퇴보

부산지역에서는 1923년 8월 김진수 씨가 동구 좌천동 688번지에서 세운 일영고무공업사를 시작으로 1934년 ㈜삼화호모(이후 ㈜삼화고무공업), 1936년 보생고무공업소, 1947년 ㈜태화고무공업사(이후 ㈜태화), 1953년 동양고무공업(이후 ㈜화승), 대양고무공업사, 1963년 ㈜진양화학공업(이후 ㈜진양) 등 신발 '빅 6'를 태동시키면서 한국경제를 이끌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은 부산을 국내 신발산업의 중심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며 노동집약적 산업인 신발산업에 필수인 노동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부산 신발은 1970년대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해 세계 1등 생산기지로 거듭나며 첫 번째 세계 정복을 이룬다. 1980년대에는 나이키, 리복 등 미국의 브랜드와 전략적 제휴를 맺으며 두 번째 세계 정복을 이룬다. 1990년 당시 부산지역 신발업체는 1123개에 달할 정도로 호황기였다.

하지만 전성기를 구가하던 부산 신발은 중국, 동남아시아의 저가 경쟁에 밀리면서 2014년 3577억 원 상당의 부가가치를 정점으로 2016년에는 3088억 수준으로 후퇴했다. 반면 전국의 신발 산업은 2014년 9861억 원에서 2016년 1조 777억 원으로 오히려 부가가치가 늘었다.

부산경제진흥원 안광우 신발산업진흥센터장은 "중견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해 부품 중심의 제조만이 남은 상태라 큰 부가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며 "아웃도어 시장이 포화된 이후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신발제조의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주었지만 나이키, 뉴발란스, 컨버스 등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브랜드를 남기며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에 제조 주도권을 넘겨준 일본 역시 아식스, 미즈노라는 브랜드는 건재하다. 하지만 제조의 주도권이 동남아시아로 넘어간 지금 부산은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글로벌 브랜드를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다.

부산가톨릭대 유통경영학과 송경수 교수는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어가며 단순 제조산업으로서 신발은 부산에서 매력을 잃었다"며 "3만 달러 시대에 맞는 부산신발 산업의 미래를 찾아야 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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