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4. 함안 주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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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연못 속 둥근 석산… 자연의 이치가 예 다 모였네

주씨고가의 무기연당은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주재성의 덕을 칭송하고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림의 공의로 만들었다. 곳곳에 초연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경남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입구에 제법 큰 공용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0m가량 고샅길을 걸어 들어가면 주씨고가(周氏古家)가 나온다. 주씨고가(경남민속문화재 제10호)는 1700년대에 지은 집으로 영조 4년(1726)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1681~1743) 이래 상주 주씨 참판공파 가문의 종택이다. 정문인 솟을대문과 중문,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 안채, 사당인 부조묘가 있고 동쪽엔 함안 무기연당(舞沂蓮塘)과 하환정, 풍욕루 등의 화려한 별당이 있다.

무기연당 비롯해 하환정·풍욕루 등
일반 고택선 보기 힘든 화려한 별당

무기연당 내 장방형 연못 '별천지'
곳곳의 작명 속에 선비정신 엿보여

'바람에 몸을 씻는 곳'이란 뜻의 풍욕루.
■장남의 서재 감은재

솟을대문엔 붉은 정려 편액이 걸려 있다. 국담 주재성의 충의와 맏아들 주도복의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각각 정조와 철종이 충신·효자 정려의 명을 내려 붙인 것이다.

한쪽 대문이 열려 있어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한여름 뙤약볕만 마당에 가득할 뿐 인기척이 없다. 며칠 전 이 집의 종손 주익재(54) 씨와 통화에서 "오후 5시 30분께 회사 일이 끝나니 그때까지 편하게 둘러 보라"는 언질을 받은 터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서쪽)에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가 소슬하게 서 있다. 감은재는 주재성의 장남 주도복의 서실로 최근까지 <국담문집> 책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이 보관돼 있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그렇게 크진 않지만, 고풍미가 완연한 건물이다.

중문채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주익재 씨 부부와 노모가 사는 주거 공간이다. 정면 5칸이며 측면으로는 전후 툇간을 부각한 2칸 규모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지붕은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이색적이다. 그러나 현대식으로 개조가 심해 고풍미가 없는 게 흠이다.

무기마을 뒤편 뒤매산 기슭에는 기양서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양서원은 주세곤, 주선원, 주각, 주재성, 주도복 등 주씨 집안 다섯 분을 배향하려고 1701년(숙종 27년) 창건됐다. 그 뒤 영조 때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주씨고가 충효 정려문.
■음양이 조화된 무기연당

주씨고가의 백미는 고가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이다. 일반 고택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이 화려한 별당은 하환정·풍욕루와 더불어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돼 있다.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주재성의 덕을 칭송하고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난이 평정된 뒤 사림의 공의로 그의 생가 한쪽 편에 만든 것이다. 이 연당을 이름해 국담이라 했는데 주재성의 호는 이에 연유한다.

어른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크기의 한서문(寒捿門)을 통해 무기연당으로 들어간다. '한서문'는 남송의 거유 주자가 강론하던 한서관의 고사에 따라 명명한 것으로, 차갑고 청빈한 선비와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는, 도학을 연구하는 선비만 이 문을 출입하라는 뜻이다.

한서문에 들어서면 공간 가운데를 넉넉하게 차지한 장방형의 연못이 별천지를 연출한다. 각각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원과 장방형, 곧 네모진 연못 가운데에 동그랗게 만든 인공 석산(石山)은 우리 고택에서 흔히 봐 온 터다. 연못을 파고 그 둘레에 계단이 되도록 이중으로 쌓은 석축은 견고함을 느끼게 한다.
무기연당 가에 있는 270여 년 된 굽은 소나무.
연당 동쪽 가장자리에는 270여 살 먹은 굽은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제 몸을 비추고 섰다. 연당 모서리에 '탁영석(濯纓石)'이 물에 살짝 잠겼다. '탁영'이란 말은 굴원의 '어부사'에서 유래한다. 굴원이 한 어부에게 "머리를 감은 사람은 갓을 털어서 쓰고 목욕한 사람은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탁영)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화답하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깨끗함을 유지하겠다는 선비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연못 곳곳에는 이러한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무기'라는 이름도 그렇다. 논어 '선진편'에 공자가 제자에게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다른 제자들은 높은 관직을 가지고 싶다고 했지만, 증점(曾點)만은 "늦은 봄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에 가서 바람 쐰 후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이었다. '무기'는 무우와 기수에서 따온 말로, 이 마을과 연못의 이름이 됐다.

연당 북쪽에 있는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樓)에서도 그런 뜻을 읽을 수 있다. '하환'이란 '어찌 자연의 삶을 벼슬과 바꿀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며 '풍욕'이란 '바람에 몸을 씻는다'는 뜻으로, 권력과 속세를 떠나 자연과 벗하며 초연하게 살겠다는 주재성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명이다. 주재성은 나라에서 세 번이나 큰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고 한다.

■고택 보수를 놓고 벌어진 갈등
자연과 벗하며 살겠다는 주재성의 의지가 담긴 하환정.
국담의 12세 종손 주익재 씨와 하환정에 앉아 집안 내력을 듣는다. 주 씨는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산서 운영하던 영어학원 문을 닫고 고택으로 들어왔다. 노모를 혼자 둘 수 없었고 종손으로서 집안을 돌볼 의무감을 느껴서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집 근처 업체에서 파이프 절단공 보조를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고택 관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택 보존과 수리 문제를 놓고 경남도·함안군과 깊은 갈등을 겪었다. 장기간 고택 폐쇄와 쌍방 고소 등 극한 대립이 이어졌다. 주씨고가처럼 표면화가 되지 않았을 뿐, 고택 유지·보수를 놓고 소유주와 행정기관 사이의 갈등은 늘 있는 문제다. 고택에 대한 예산 부족과 일부 소유주의 무리한 요구, 행정기관의 관료주의 등 복합적인 요인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올해 초 주씨고가의 문은 다시 열렸고, 헛간채 보수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주 씨는 "행정기관이 좀 더 세밀하게, 원형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문화재 보수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사액서원이었던 기양서원을 복원하고 주재성 할아버지의 저서들을 제대로 번역해 세상에 알리는 게 필생의 업"이라고 힘줘 말했다.
주재서의 12세 종손 주익재 씨.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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