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에어컨 구입 적기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며칠째 안방에 갇혀 지낸다. 가족 모두 집에 있는 동안은 안방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 멀쩡한 식탁을 두고 소반을 안방에 들여 끼니를 해결한다. 행여 부엌이나 거실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순식간에 해치우고 안방으로 복귀한다. 집안의 나머지 공간은 사막과 다름없고 안방만이 오아시스다. 오아시스에는 10년 된 벽걸이 에어컨이 있다.
덥다. 그 어떤 말로도 더위를 누그러뜨릴 수 없을 만큼 덥다. 여름이니까 더운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더운 것이 당연하듯 더위를 참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예전 여름은 지금보다 더 더웠다는 말도 아무런 위로가 못 된다. 추억 속의 여름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더웠고 겨울은 더 추웠다. 그런 말들은 마치 빙하기는 혹독하게 추웠고 금성은 기온이 462도에 달할 만큼 뜨겁다는 말처럼 공허하다. 우리는 빙하기를 살던 매머드가 아니고 우주를 떠도는 외계 생명체도 아니다.
지옥 같은 더위 수그러들지 않고
미세먼지로 창문 제대로 못 여니
'문명의 이기' 에어컨 활용해야
정신력만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없는 것처럼 요즘 더위는 '정신 승리'로 견딜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 많은 학자가 빈번한 기상 이변의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를 지목하고 있듯이 요즘 더위는 누구도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초유의 현상이다. 게다가 더 암울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지독한 더위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지옥 같은 더위가 적어도 우리 생애에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화석연료 사용이 단기간에 줄어들 리도 없고 거대한 기후변동이 몇 년 만에 멈출 리도 없을 테니까.
정신력만으로 더위를 견딜 수 없다면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야 한다. 그중의 제일은 에어컨을 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에어컨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그것은 더위를 몰아내기도 하지만 더 큰 더위를 불러오기도 한다. 에어컨과 냉장고의 냉매로 쓰였던 프레온가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몇 년 전부터는 프레온가스 대신 친환경 냉매제가 쓰인다고 한다. 그러나 친환경냉매제가 쓰인 에어컨 또한 실외기를 통해 열기를 쏟아내서 도시의 '열섬' 현상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누군가 에어컨의 구입 적기를 물으면 이렇게 일러주어야 한다. 아랫집, 옆집, 건너편 집 모두 에어컨을 구입했을 때라고. 더위보다 더한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가 당신의 집을 향할 때라고.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에어컨을 거의 틀지 않고도 여름을 날 수 있었다. 바깥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구석진 아파트인 데다 주변에 실외기도 많지 않아서 집안의 모든 문을 열고 선풍기를 돌리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여름인데도 창문을 활짝 열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여름에도 극성을 부리고 있어서다. 예전 여름에도 미세먼지 농도가 높았는데 관심이 없어 무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올해 들어 유별나게 여름에도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이 어떻든지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혹은 '매우 나쁨'이라는 알림을 보고도 창문을 열고 지낼 수는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모를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요새는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면 왠지 공기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목도 괜스레 따끔거린다.
이제 창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니 열거나 닫거나 살기 어렵기는 매한가지가 되었다. 더위와 미세먼지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낡아빠진 에어컨이라도 있는 안방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다. 물론 거실에도 에어컨을 들이면 안방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목돈이 드는 데다, 설사 돈이 있어 에어컨을 주문한다 해도 요즘 같은 성수기에 언제쯤 설치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에어컨의 구입 적기를 물으면 이렇게도 대답해 줘야 한다. 미세먼지의 위험성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라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공기에서 초미세먼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