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독작 찬가(獨酌讚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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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태백 아재! 천하의 대문호를 옆집 아저씬 양 부르려니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한량들과 붓쟁이들이 발끈할까 걱정이네요. 서양 사람이지만 아재를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미지즘의 원조 시인 에즈라 파운드까지 가세해 불경죄에다 괘씸죄를 들씌워 저를 공격 파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머리에 이백이란 이름은 세사를 초월한 호탕한 시선이자 우주와 통하는 무한한 시상의 광맥으로 아로새져져 있으니 말입니다. 호수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우화등선했다는 웃기는 거짓부렁을 굳이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심사를 보아도 알조 아닙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삼천 배를 들이켠 과음 상태의 거한이 객기를 부려 밤에 조각배를 타고 뒤뚱거리다 중심축이 좌현이나 우현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바람에 사고사했을 개연성이 농후하겠지요.

"혼술의 아득한 원조는 이태백
'월하독작'은 혼술 철학의 정수
우주와 통하는 물아일체의 대도"

하나 아재여! 주독 오른 딸기코 얼굴에 '란닝구' 바람으로 집 앞 평상에 죽치고 앉아 "어이, 학상! 이리 온나. 우리 탁주 딱 한 잔만 하자"던 신림동 하숙집 바깥주인 진양 정씨 은열공파 후손 정삼돌 아재처럼 당신이 친숙하고 다정하게만 여겨지니 어쩝니까. 더구나 옛 시구 그대로 천년이 수유요, 만 리가 지척인데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시공의 거리가 무슨 윤리적 장벽이 되겠습니까. 정치판에서 독박을 뒤집어쓰고 쫓겨나 친구 하나 없이 혼자서 잔 기울이며 읊으셨던 시편들을 떠올릴 때마다, 타고난 유심을 무심으로 포장하고, 넘치는 유정을 무정으로 각색한 당신의 슬픔과 외로움에 새록새록 가슴이 저립니다.

아재께서 안녹산의 난으로 '쑥새기판'이 된 당나라 조정에 공연히 애국한답시고 한발 들여놓았다가 반역죄로 쫓겨났을 당시는 술과 시 외에는 아무 소일거리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퇴직해 적당히 나이 들면 지하철 공짜에 명승고적이 무료라 지공대사와 지공선녀들이 떼로 몰려다니기 꼭 좋은 데다, 50인치 TV가 천하의 기관과 희한한 이야기들을 제집 안방에서 보여 주고 들려주는 세상 아닙니까. 골치 아픈 뉴스 따위는 아예 사양한 마당에 요즘 즐겨 보는 것이 '고독한 미식가'란 일본 드라마인데 정말 재밌습니다. 동경 뒷골목 이름 없는 맛집에서 고독남 이노가시라 고로가 사흘 굶은 사자처럼 음식을 뜯어 발기는 대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접시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이타다키마스"하며 공손히 절을 올릴 때는 "야! 먹는 것도 예술이자 종교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아재가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낄낄대고 보시면서 혼술을 쪼~옥 한잔하시겠지요.

근데 아재여! 세상이 다 잊고 있지만 지금 한반도를 휩쓸고 있는 혼술의 아득한 원조는 바로 당신 아닙니까. 돼먹지 못한 잡생각에도 '~ 철학'이니 '~이즘'이라고 이름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경박한 세태를 감안한다면, 청련거사 당신의 '월하독작' 2수야말로 혼술 철학, 혹은 혼수리즘(Honsurism)이란 전대미문의 독창적 사상체계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할 가장 훌륭한 전거가 아니겠습니까. 현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혼밥과 혼술을 통해 '사람[人]'은 '사람과 사람들[人間]'이란 사회적 의미를 벗어나 그 무엇과도 관계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자인 '혼자[一人]'로 우뚝 서게 된 거겠지요. 니체는 구구한 선악의 분별을 넘은 초인을 갈망하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고 외쳤거니와, 오늘도 주막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혼술로 혼수상태에 빠진 독작인이 혹 그 아닐는지요.

당신은 말합니다. "석 잔 마시면 우주의 도에 통하고/말술 들이켜면 천지자연과 한 몸이라." 이 물아일체의 대도에 드는 마당에 주모와 시시덕거리거나 상사에 아부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말 없는 저 달과 내 그림자를 벗 삼아, 우주 한 귀퉁이에 먼지처럼 뒹구는 나를 응시하며 홀짝 들이켜는 한 잔. 진리에 통하는 철인에게 그것이 80도 테킬라면 어떻고 0도 맹물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진짜 끝내주는 맛은 싱거운 법이라고 소강절은 말했고, 노자도 천지간에 가장 오묘한 술[玄酒]은 바로 맹물이라고 갈파하지 않았습니까. 아아, 취하도다! 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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