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시인 김수영과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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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1968년의 문단은 비감했다. 조지훈 시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뜬 지 한 달 만에 김수영 시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는 이해 4월 13일 부산에 와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유명한 시론을 발표하였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소위 '온몸의 시론'을 웅변한다. 이후 두 달이 조금 지나 신동문, 이병주 등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인도로 돌진한 버스에 치여 쓰러진다. 지난 16일로 작고 50주년을 맞았다.

김수영과 부산의 인연은 깊다. 1941년 일본 유학을 가면서 부산을 경유했으리라 짐작한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부산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다. 부산이 생애에 각인되기는 그가 1950년 인공치하 서울에서 의용군에 징집되었다 탈출하여 포로가 되고 난 뒤부터다. 부인인 김현경 여사조차 인천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리를 다친 김수영은 인천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부산의 서전병원을 거쳐 거제리 제14 야전병원으로 이송된다. 이 시기에 벌써 그는 미군에 의해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영어가 능숙한 그는 통역을 겸하면서 병원 일을 돕는다. 포로 신분으로 비교적 관대한 처분이 아닌가 하는데 이는 그의 에세이 '면봉'을 통해 알 수 있다. 포로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1951년 초부터 1953년까지 병원에서 '면봉'을 둘러싼 논란을 서술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계 의사와 한국 의사들이 보이는 처방의 추이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말한다.

거제리 포로수용소서 3년 보내
시적 원형인 자유의 의지 싹터
'시여, 침을 뱉어라' 부산서 발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김수영이 간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1951년 전반으로 보인다. 부산의 수용소가 넘쳐 거제도로 포로 이송을 시작한 2월 말부터 6월 사이인데 그나마 거제도 생활은 길지 않았다.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과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종합할 때 그러하다. 부산으로 돌아온 김수영이 풀려난 곳은 충남 온양 국립구호병원이다. 1952년 11월 28일이니 1950년 11월 11일 부산으로 온 후 25개월 되는 즈음이다. 풀려난 곳도 병원이고 보면 김수영은 줄곧 병원에서 일을 거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포로로서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통이 컸음은 틀림이 없다.

석방 이후에도 김수영은 생계를 위하여 부산과 대구 등지를 전전한다. 구포 근처에 그의 가족이 피난 와서 거처한 쪽방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내와 헤어지는 수난을 겪는다. 여전한 전시하에서 일어난 일로 김현경이 김수영의 선배인 이종구를 만나 구포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이다. 6개월이 지나 김수영이 그들을 찾았지만 김현경은 이미 수영과 이혼을 생각한 터, 나중 서울로 환도하여 이혼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수영과 재결합한다. 1953년 휴전 이전에 김수영은 부산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포로 생활을 증언하고 있는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이 부산에서 발간한 <해군>지에 실린 사실로도 유추된다.

김수영의 포로수용소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엇갈린다. 그의 진술에 수용소 이후의 이데올로기적인 자기 검열이 개입하였을 터이고 그의 아내조차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고 진술한 데 기인한다.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은 박태일과 이영준의 새로운 자료 발굴로 이미 수정을 겪었다. 여하튼 부산의 전시 포로수용소 사정은 박도의 장편소설 <약속>에 잘 나타나 있다. 부산의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수영과 가야로 확대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완성되면서 줄어든다. 김수영이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햇수로는 3년, 달수로는 25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의 시적 원형인 자유의 의지가 이곳 부산에서 태동하였기에 1968년 강연의 제목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을 나중에 '시여, 침을 뱉어라'로 고쳐 말한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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