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월드컵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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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준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스포츠는 비정치적 행위이지만, 정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은 스포츠 교류를 통해서 교착 상태에 있는 국가 간의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려 하였다. 1970년대 중국과 미국은 2.5g에 불과한 탁구공을 매개로 20년 이상 막혀 있던 교류의 징검다리를 놓은 '핑퐁 외교'를 선보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역시 10년 이상 막혀있던 남북관계 경색을 해소하고,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를 성사시킨 촉매 역할을 하였다.

지금 지구촌의 가장 큰 이벤트인 월드컵이 러시아에서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각국의 지도자들은 러시아 월드컵을 기회 삼아 국내외적 정치적 어려움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이란의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그리고 그의 라이벌 사우디아라비아 빈 살만 왕세자 모두가 러시아 월드컵에 앞서 국가대표팀을 격려 방문하고 언론을 통해 홍보하였다.

푸틴, 실추된 국가 이미지 반전
빈 살만 왕세자, 개막전서 수모
아베, 일 선전에 위기 모면 기회
문, 경기 패배 불구 정치적 승리

16강 희망 멕시코 승리에 달려
주변국 의지하는 현실에 '씁쓸'


개최국 러시아는 이번 월드컵을 통하여 실추된 국가 이미지를 반전하려 한다. 그동안 러시아는 미국 대선 개입설, 이중 스파이 암살 시도,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미국과 유럽의 각종 제재를 받고 있다. 게다가 도핑 스캔들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국가로 출전할 수 없었다. 러시아 선수들은 러시아 국기가 빠진 유니폼을 입어야 했고, 러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색깔도 사용할 수 없는 치욕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 월드컵은 국가 이미지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러시아 팀의 개막전을 참관한 푸틴 대통령은 시축 전에 연설을 통해서 러시아의 가치를 찬양하였다. 행운의 여신이 푸틴에게 미소를 보내듯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 연승함으로써 16강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운전을 금지했던 국가이다. 그러나 사우디 국왕은 월드컵 기간인 6월 24일부터 여성이 운전대를 잡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의 후계자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개막전에 푸틴과 나란히 앉았다. 아쉽게도 그의 대표 팀은 푸틴의 러시아에 무려 다섯 골이나 선사하는 좌절을 겪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국가대표팀을 적극 응원하였다. 그는 최근 국내적으로는 각종 스캔들로 낙마 위기이고, 밖으로는 트럼프 미국 정부로부터 무역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최근 동북아 정세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첫 경기에 앞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트위터에 올렸다. 다행히 일본은 콜롬비아와의 첫 경기에서 승리하였고, 강팀인 세네갈과도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아베의 정치적 운이 마르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월드컵 기간에 문재인 대통령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하였다. 러시아는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이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이 철도·가스·전기 분야를 중심으로 남·북·러 3각 협력으로 발전한다면, 변덕스러운 평화를 경제를 통해서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 대표 팀은 스웨덴과 멕시코전에서 모두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멕시코 경기 직후 로커룸을 찾아 경기의 패배를 정치적 승리로 반전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뒤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는 손흥민 선수를 아버지같이 감싸 주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여 줘 국민들도 아주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젊은 세대들과 정치적으로 소통하였다.

문 대통령이 운이 좋아서일까? 우리는 2패를 하여 승점을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독일이 스웨덴과의 경기 끝부분에 극적인 역전 골을 넣어 기사회생하면서, 우리도 덩달아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는 산술적 희망을 얻었다. 호흡은 멈추었지만 뇌사 판정을 받지 않은 상태라고나 할까. 우리가 만약 28일 독일에 승리를 거두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잡으면 한국과 독일, 스웨덴 등 3팀이 모두 1승 2패를 기록한다. 이때 골 득실, 다득점을 통해 최종 순위를 가려 결과에 따라 한국이 16강 진출을 타진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수였던 멕시코를 응원해야 하는 꼴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못 하고 주변국에 의지하는 모습이 어찌 축구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동지도 없고, 오직 국익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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