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A' 이경섭 감독, 원작의 성공적 변주와 포근히 안기는 공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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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A'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경섭 감독.

성큼 다가온 주말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 영화관 앱을 실행시켜보면 '독전', '탐정', '쥬라기월드', '앤트맨' 등 큼직한 영화들이 상영 중이거나 준비 중이다. 화려함으로 무장한 포스터들이 즐비한 가운데 소년 소녀가 수줍게 서 있는 소박한 사진 하나가 눈에 띈다. 담백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눈길을 끄는 이 포스터에 적힌 제목은 '여중생A'다.

'여중생A'는 중학생 미래(김환희)와 친구들의 성장기를 그리는 영화다. 포스터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 거창하지는 않지만 가슴에 따스함과 뭉클함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특이한 점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포털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사랑 받은 작품인 만큼 그 안에는 왕따, 일진, 성적지상주의 등 학교 문제 뿐 아니라 가정 폭력 같은 사회적 문제가 골고루 잘 녹아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두 시간 남짓한 영화 러닝 타임에 담기는 어렵다. 때문에 연출을 맡은 이경섭 감독은 '미래의 왕따극복기'라는 에피소드를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했다.

이 감독에게 이번 작품은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단편영화로 단련된 실력 덕분일까, 그는 옆길로 새는 것 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짚어내고 그 가운데 동화적인 느낌을 적절히 섞으며 "원작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이 감독을 최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 감독은 기자가 인터뷰에 앞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본 모습보다 확연히 말라보였다. 이유를 묻자 그는 "연출자로서 관객들께 제 영화를 보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책임감과 불안감이 강하다"라며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입맛도 없다. 그러다보니 살이 빠진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 이경섭 감독의 성공적인 '집중과 선택'

다소 힘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나 이 감독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여중생A'는 취미는 게임, 특기는 글쓰기, 자존감은 0%인 여중생 미래가 처음으로 사귄 현실친구 백합과 태양, 그리고 랜선친구 재희(김준면)와 함께 관계 맺고 상처 받고 성장해 나가는 내용이다. 학생들의 이야기다보니 캐스팅 과정이 궁금했다. 성인 배우들은 연기력으로 정평난 이들이 많지만 아역들의 경우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공식 오디션은 없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부 회의를 정말 많이 했어요. 그 결과 많은 후보들 중 환희 양이 미래 역에 가장 적합하다고 입을 모았죠. 연기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때 '늘 불안하다.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라고 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늘 자기 검열하고 검증하는 배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아역으로 보이지 않고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재희의 경우는 더 힘들었다고. 워낙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캐릭터인데다가 흐름상 매우 중요한 위치의 배역이라 적합한 배우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만족스러운 인물을 발견하지 못한 이 감독은 "그래서 연령대를 높여 봤다"며 "이때 노란머리로 염색한 김준면을 보게 됐는데, 그게 너무 잘 어울려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블록버스터나 스릴러 같은 장르물을 제외하면 러닝타임 2시간짜리 영화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하지만 '여중생A'는 117분이다. 학생들의 이야기고 드라마라는 특성상 다소 긴 편이다. 그런데 의외로 속도감이 느껴진다. 보고다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다.

"편집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죠. 첫 편집본은 2시간 20분이었어요. 원작에서 덜어내고 덜어냈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걸 담았나 싶었더라고요. 결국 미래의 상황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많이 뺐어요."

덕분에 미래와 백합(정다빈)이 친해지고, 이를 노란(정다은)이 질투하고, 따돌림을 게임친구 재희를 현실에서 만나서 치유 받고, 그러다 학교의 상황이 역전되는 일련의 과정은 복잡하지도 단순하지도 않게 그려졌다.


그러나 살짝 의아함이 들긴 하다. 10대를 가리켜 '질풍노도의 시기'라곤 하지만 미래네 반 학생들의 태도 변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속도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기시감'을 배제하기 위한 이 감독의 계산이었다.

"사실 학교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아요. 그런 것들을 살펴봤는데 전개 방식이나 장면들이 익숙하고 반복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저희 영화 역시 그런 범주에선 자유롭기 힘들고요. 그래서 다른 부분을 더 보여드리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 아이들이 친해지는 부분은 빠르게 넘어가도 괜찮다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미래가 모든 걱정을 잊고 집중하는 게임 '원더링 월드'의 실사화다. 최근 국내외 영화들이나 게임 업체들이 내놓는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하지만 스크린에 그려진 '원더링 월드'는 그렇지 않다. 김환희를 비롯한 극 중 배우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몬스터와 대결을 펼친다. 다소 유치한 느낌이 들지만 이유가 있다.

웹툰과 영화 속 배경은 2005년이다. 당시 게임 그래픽 수준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처럼 화려한 영상은 오히려 과하다. 당시 인기있던 '마비노기', '라그나로크', '아스가르드' 등을 플레이해본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그래서 이 감독은 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애니메이션처럼 만들어볼까도 했지만 그냥 실사화했어요. 대신 미래의 반 아이들을 1인2역처럼 출연시켜 미래의 무의식을 보여주려 했죠. 그리고 사실 애니메이션 성우분들을 모셔서 목소리를 입혔어요. 미래를 제외하고요. 그렇게 게임 인물들을 반 아이들과 분리시켜 구분지어 오히려 미래에 집중하는 효과를 만들어봤죠."

▲ 이유있는 변주, 원작 해치지 않으면서 공감은 그대로

미래와 백합, 노란이 같은 경우는 원작과 세세한 에피소드를 제외하곤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미래의 정신적 성숙을 이끌어 온 재희의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노란 머리는 같지만 '인형탈'이라는 없던 설정이 추가됐다. 그리고 거기엔 그의 속사정이 얽혀있다.

재희는 미래와 친구지만 사실 나이는 더 많다. 하지만 미래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눈높이와 마음을 맞춰주는 친구다. 그가 그런 성숙함을 지닐 수 있는 건 과거 친구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시간이 흐른후 반성하고 속죄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친구를 직접 만나 용서를 빌기 위해 인형탈을 쓰고 프리허그를 하며 계속 기다리고 있다. 이 부분이 영화에 추가된 것. 그리고 이 감독은 이 설정에 대한 힌트를 우연히 얻게 됐다.

"재희도 아픈 상처가 있어요. 하지만 잘못도 했죠. 그래서 용서를 빌기 위해 친구를 기다리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나리오를 쓸 때가 여름이었는데, 사무실 밖에 인형탈을 쓴 분이 벤치에 앉아있더라고요. 탈이니까 표정은 똑같잖아요. 그런데 그 몸짓에서 지치고 처량한 느낌이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이런 이 감독의 '전략'의 먹혀들어간 모양새다. 처음엔 학교도 안 가고 철 없이 프리허그 행사나 하는 모양새처럼 보였지만, 미래와 관계를 맺고 재희의 속마음이 드러난 후 관객들은 똑같았던 인형탈의 표정과 몸짓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미래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다. 미래는 집에서 아빠의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웹툰에서는 모종의 사고로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며 미래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아껴주는 엄마와 행복하게 살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선 가정폭력은 나오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는다. 어쨌든 미래는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관객들은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이 감독도 아쉬워했던 부분이다.

"사실 미래가 아빠로부터 해방되는 장면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넣느냐 마느냐에 고민이 많았어요. 미래에 집중하긴 하는데 그건 '학교 생활'에 관한 부분이거든요. 아빠 에피소드를 넣는다면, 그 부분이 매듭지어지는 과정도 설명해야하는데 그러면 이야기가 분산되더라고요. 게다가 학교와 가정은 결이 달라요. 한쪽에 힘을 싣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됐어요."

앞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어둡다. 그렇게 되면 재미는 둘째치고 관객들은 미래의 감정에 짓눌리게 된다. 공감하며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연출자로서도 할 짓이 못 된다. 이런 분위기를 이완시키고 때로는 전환까지 시켜주는 캐릭터가 미래의 담임선생님(이종혁)이다.


사실 그는 원작서 재희와 함께 미래의 성장을 책임지는 인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웹툰 후반부에 그려진다. 영화는 원작의 전반부를 그리기 때문에 이를 담기 힘들다. 그래서 이 감독은 담임선생님을 활력소로 활용했다.

"영화 '미쓰홍당무'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종혁 씨가 거기서도 선생님으로 나와요. 잘못한 게 없는데 억울한 캐릭터에요. 거기서 힌트를 얻었어요. 그래서 우울한 영화의 이야기를 상쇄시키는 방향으로 연출했죠. 초반부엔 얄밉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긴장을 완화시켜줘요. 그 역할을 잘해주셔서 감사드리죠."

덕분에 '여중생A'는 아이들의 태도 전환 속도가 의도적으로 빠르게 연출됐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웹툰과 유사하면서도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 감독은 "원작자 허5파6 작가님은 사실 영화화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면서 "그런데 최종본을 보시고는 만족하시면서 응원을 많이 해주셨다. 그게 큰 힘이 됐다"고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웹툰이나 소설 등을 변주해 재탄생한 작품들은 원작 팬들의 날카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좋아하는 매력 포인트가 각자 다른 관객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호평과 혹평을 내놓는다. 지난 20일부터 상영을 시작한 '여중생A'도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다. 다행히 기사 댓글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관람평을 보면 대체적으로 "미래가 행복지는 포인트를 잘 살렸다"며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통쾌함이나 긴장감을 무기로 하는 대작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따스한 감수성을 마음에 전달하는 '여중생A'로 이번 주말을 행복하게 보내는 건 어떨까.

김상혁 기자 sunny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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