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내가 김정은·트럼프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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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보통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내일 날이 궂을까 혹은 너무 많이 내리는 비를 염려하는 당장의 관심 때문일 게다. 그렇게 매일 같은 시간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뜻밖에도 하늘의 변화를 깨닫게 된다. 늘 거기 있는 별과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큰 별을 알아차리게 된다. 심지어 다른 별들과 달리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별을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일상의 염려로부터 시작해 항상 거기 있는 별(항성·붙박이별)과 수시로 달라지는 별(행성·떠돌이별)을 알아차리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다. 하늘의 움직임을 우리의 일상사와 연관 짓는 종교와 철학이 생겨나고, 그 원인을 이성적으로 가늠해 보는 과학과 학문으로 발전했다. 이렇듯 우리가 힘든 일상에서 소소하게 기울였던 관심이 뜻밖의 생각과 화두로 발전하여 하나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다.

취업 준비 여념 없는 젊은이들
세상일에 무감한 것 같지만
삶 둘러싼 일상의 변화에 민감

곧 지방선거, 북·미 정상회담
보수·진보 낡은 패러다임 넘어
작지만 다양한 변화 이뤄 내야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통해 젊은 학생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나에게 무척이나 소중하다. 흔히들 대학입시에 시달리다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의 자유롭고 발랄한 대학캠퍼스를 상상하겠지만 대학생들의 실상은 다르다. 계절 학기나 부전공, 복수전공에 의학·법학전문대학원은 물론 공무원 시험 준비와 각종 자격증 취득에 이르기까지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모처럼 상담이라도 하는 날엔, 취업과 진로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관심들로 넘쳐 났다. 사회와 사람, 자연에 대한 관심, 여기에서 출발한 배움과 이상에 목말라하는 젊음은 어디 갔을까.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을 적지 않은 실망감으로 개탄해 온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젠 가슴 뛰는 기대보다는 소소하게 학생들과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문득, 우리의 이야기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어느새 내일의 거창한 불안함이 아니라 각자의 소소한 바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함과 부당함을 잔잔한 일상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젊음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와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리라.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어른들의 잘못을 그렇게 죄스러워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대참사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보고 있었고, 그렇게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촛불은 횃불이 아니었지만, 잔잔하면서도 분명했다. 주목할 것은 그 변화가 대단히 일상적이며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다. 흔히 보수와 진보라는 틀에 박힌 낡은 패러다임이 아니라, 자신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장학생이라는 수혜를 받았으니 누구라도 그런 정책을 펴는 사람을 지지하겠다든가, 단순히 너무 획일적인 모습이 싫어서 동성연애도 허용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 혹은 심지어 애완동물의 병원비가 너무 비싼데 그런 의료보험도 필요하지 않으냐는 식이다.

서울토박이로 오랜 유학생활 끝에 생면부지의 부산에 내려와 가장 낯설었던 풍경은, 거의 당연하게 오랜 세월 지역 유지로 있는 어르신의 정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정치풍경이었다. 그 정당의 정책이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는다 해도 그 정당밖에 없다는 데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 국에 그 나물인데, 그나마 구관만 한 명관이 없다는데 아무도 거기에 토를 달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도 이젠 그러려니 지내온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최근 문득 일상의 소소한 변화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북한 정상의 번개 미팅에 환호하면서 새삼스럽게 김정은과 트럼프까지 걱정하는가 하면, 모 정당대표의 발언이 우스개처럼 희화화되기도 하고, '남북이 사이좋게만 살아가믄 을매나 좋겠나'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곧 지방선거다. 그 전날 역사적인 트럼프·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이 있다. 이젠 선거도, 남북의 만남도 더 이상 보수·진보의 낡은 패러다임처럼 심각하지 않다. 일상의 내게 다가오는 잔잔한 반향이 중요할 뿐, 이젠 더 이상 특정정당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되는 풍토도, 어느 당은 무조건 안 된다는 싸움판도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진리를 모르지 않지만, 어쩐지 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잔잔하고 다양한 변화가 자연스럽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운 감동을 받는다. 이제 부산 시민들도 남북한, 북·미 관련 세계 뉴스를 보면서 선택하는 시대가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당당히 오고 있구나. 내가 그렇게 성토하던 트럼프 걱정까지 하고 앉아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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