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과 함께하는 도시 항해] 9. 전포카페거리 일대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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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에 묻힌 시·공간의 흔적들…

어지간한 세파에 휩쓸리고, 쓸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그 자국을 부표 삼아 새 생명이 돋고, 하나둘씩 삶터가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가공할 자연 위력이나, 칠흑 같은 망각의 힘이 한 올의 자취마저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수천 년 세월이 흐른 뒤 제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한다. 무모하다는 주위 우려를 뿌리친 채 인생과 재산을 온통 쏟아부은 이들에 의해서다. 베수비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나 까맣게 잊혔던 트로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고층 빌딩과 인파로 넘치는 부산 서면 거리를 걸으면 그런 고적의 사연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부산은 인간사 지층이 겹겹이 쌓인 도시다. 임진왜란의 첫 결전지이자 패전의 땅이었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영의 전초기지였다. 한국전쟁 때는 임시로 수도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산업화의 관문 도시였다. 그렇지만 서면의 겉모습만 보고는 과거 이력을 좀체 찾기 어렵다. 그만큼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앞세운 개발 바람이 거셌던 탓이다.

부산 도시철도 범내골역서 출발
동명목재·제일제당·경남모직 터
동천 일대는 한국 제조업 발상지
전포동 일대엔 서면 포로수용소
화려한 빌딩 뒤엔 여전히 낡은 집
카페거리 책방들은 또 다른 매력


예전에 시간을 달리하며 한 공간을 차지했던 건물이나 시설들이 마그마에 녹은 듯 사라져버렸다. 이번 발걸음은 그 자취를 발굴하는 여정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수차례 시도로 트로이를 일으켜 세우고, 주세페 피오렐리가 흙더미 사이사이 공간에 석고를 부어 사라졌던 사람 형상을 드러냈듯이.

■한국 제조업 태동지 동천 일대

출발점은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범내골역 8번 출구. 지하에서 빠져나와 200m가량 곧장 가면 동천을 건너는 광무교가 지척이다. 오른편에 높게 솟은 건물이 알리안츠생명 사옥이고, 그 뒤편이 부산교통공사다. 각종 사무실과 식당들, 아파트들로 가득한 전형적인 도심지 분위기다. 이곳이 우리나라 제조업 태동지였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알리안츠생명 사옥이 동명목재 옛터였다. 시간을 되돌려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한 동천 일원의 모습을 흑백필름 돌리듯 떠올려본다.

1963년 남구 용당동에 새 용지를 마련하기 전까지 동명목재는 현재 알리안츠생명이 앉은 부지에서 공장을 가동했다. 동명목재 옛터가 인근 부산교통공사까지였다는 기록도 있다. 1925년 강석진 회장이 좌천동에 세운 동명제재소로 출범한 이 회사는 전성기에는 세계 최대 합판공장으로 불렸다. 1969년 이후 7년간 연속으로 전국 수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목재 왕국' 동명목재의 흔적은 동명대를 비롯한 동명문화학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광무교를 건넌다. 차량 통행 위주로 짜진 도로 구조가 안전을 위협한다. 특히 요식업체 빕스 부산서면점에서 CJ오거리 간 신천대로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가느다란 인도도 없고, 가드레일도 설치돼 있지 않아 가장자리로 움츠려 걸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교보문고 뒷길을 통해 더샵센트럴스타아파트를 한 바퀴 돈다. 이 아파트는 2011년에 입주했기에 이곳이 제일제당 자리였던 걸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흰색 설탕 '백설표 설탕'을 생산했다. 당시 하이테크산업이었던 설탕 생산은 삼성그룹을 있게 한 밑거름이었다.

더샵센트럴스타아파트 뒤쪽은 한국전력공사 부산·울산지역본부다. 이 터는 과거 전차 종점이었다. 전력으로 움직이던 전차 종점이 한전 지역본부로 바뀐 것이다. 부산의 전차는 1915년부터 50년 넘게 운행됐다. 일제강점기에 노면 전차가 운행된 도시는 부산·서울·평양 등 국내에서 세 곳뿐이었다. 부산은 그만큼 '모던'한 도시였다.

동천로 너머 종로학원 쪽으로 들어간다. 옛집들로 가득한 자연 부락이다. 빈집들이 많다. 화려한 도시 속 슬럼가다. 가수 조용필의 노래 '꿈'의 가사 일부분이 연상된다. "…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빌딩 속을 헤매이다 초라한 골목에서/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 멀리 BIFC 6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소외된 곳에서 선택된 곳을 바라보는 심정이 묘하다.

좁고 황량한 골목에서 나오니 경남공업고등학교다. 길 위쪽 교문에서 내려오는 인물이 지인이라며 이성훈 선장 얼굴에 저절로 웃음 주름이 생긴다. 그의 정체는 정두환 음악평론가. 경남공고에 교사로 근무하는 정 평론가는 수백 회의 무료 음악 강좌를 이어가고 있는 유명 인사다. 음악과 인문학을 시민과 공유하는 행위를 몸소 실천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에게 우리가 방금 걸어온 자연부락의 인상을 털어놓았다. 자신도 그곳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마련하려는데 집주인을 도통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화려한 불빛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 짙다는 진리를 절감한다.

부산 서면 도심에서 본 슬럼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서면 동네

경남공고 내에는 고 강수영 열사 추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1960년 4월 19일 민주화 시위 중 경찰의 총탄에 숨진 경남공고 학생 강수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지금도 그날이면 추모제가 열린다. 열아홉 살 청춘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금석문이 읽으니 가슴이 저린다. 학교를 나와 동천로를 걷는다. 전포천을 복개한 도로다. 도시철도 1호선 건설 공사를 시작하면서 우회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도시철도 1호선 서면역과 2호선 전포역 사이에 놓인 이 도로 일대는 새로운 다운타운으로 성장 중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각종 학원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꼽힌다. 도롯가의 멋진 외양과 달리 뒷골목은 낡은 집들이 나뒹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후미진 곳을 수시로 시각과 후각으로 확인하며 길을 걷는다. 하지만 동천로 일대 골목은 변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물이 그 단단한 콘크리트를 적시듯이, 꽃봉오리가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듯이.

쥬디스 태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매장의 전신인 태화쇼핑은 한때 면적당 한국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던 백화점이었다. 이 대규모 소매점의 몰락은 재벌 자본의 향토 잠식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 후문 쪽으로 번성했던 서면극장가의 쇠락도 알고 보면 태화쇼핑 신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동보극장, 태화극장, 대한극장은 1960~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멀티플렉스 등장으로 그 영화관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950년대 말 대한극장 인근에 육군형무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쥬디스태화백화점 신관 너머로 형성된 식당 골목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좁은 길은 가벼운 주머니의 옛 공구상가 사람들이 끼니를 해결하고, 회포를 나누던 곳이다. 지금은 원조를 내세우는 곱창, 복국집과 젊은이 취향의 경양식, 외국 음식점 등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세대 간 화합의 골목이라 불러야 할지, 신구 교체의 골목이라 불러야 할지 헷갈린다. 그중에 멕시코와 이탈리아의 낯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억남의 그릴(051-802-2469)'이 이목을 끈다. 그곳을 빠져나오니 몇몇 공구 상가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조금 전 거쳐온 식당 골목의 현재를 어찌 판단해야 할지 감이 오는 장면이다.

살짝 드러나는 NC백화점 서면점 지붕 귀퉁이를 따라 걷는다. 백화점 터는 한때 제일모직과 함께 국내 모직업계의 쌍두마차였던 경남모직(한일합섬)이 있던 자리다. 섬유산업이 한국경제의 주축이었던 1970년대에는 "경남모직에 다니는 미혼 남녀가 최고의 신랑 신붓감"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전성기는 산업구조 과정을 거치면서 쇠퇴기로 바뀌고 말았다. 결국, 1995년에 공장 터까지 매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옛 공장 건물 활용 상가.
■카페~전기 상가~수용소 지층

서전로 횡단보도를 건너 200m 정도 나가면 전포초등학교다. 서면중앙시장을 지나면 부산진소방서 구조대가 보인다. 소방서 맞은편 울산식육식당(051-816-9292)은 오래전부터 맛집으로 통하는 곳이다. 초리구이와 육회가 유명하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근린공원은 도시철도 1호선 부전역 8번 출구 근처까지 이어진다. 이 일대에는 부산지역 고무공장의 역사가 녹아있다.

지금은 아무리 봐도 짐작하기 어렵지만, 대양고무와 흥아타이어 공장이 있던 곳이다. 대양고무의 신발 상품 '슈퍼 카미트'는 어릴 적 신발 하나로 세상을 얻은 듯했던 추억을 자극한다. 흥아타이어는 지금의 넥센타이어와 맥이 닿아있다.

가던 길을 되짚어 전포초등학교 뒷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가 전포카페거리다. 애초 카페거리는 서전로 너머에서 시작했다. 그 후 상가 권리금과 임차료가 급히 올라가고 말았다. 이에 따라 좀 더 값싼 점포를 구하려는 움직임이 이렇게 상권 확산이란 결과를 낳았다. 새 점포들이어서 그런지 신선한 감각이 담긴 인테리어가 자주 눈길을 끈다.

NC백화점 서면점 뒤쪽에 '전포카페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그 근처에 전기·전자용품 판매·수리업체가 즐비하다. 이런 점포들 가운데 상당수가 카페와 식당, 옷집으로 바뀐 게 현재의 카페 거리다. 일 층은 전기 수리점이고 이 층은 카페인 한 건물이 그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포카페거리의 또 다른 매력은 작은 책방들이다. 책방밭개와 북그러움은 서점 주인의 취향과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갈수록 발붙일 곳 없는 오프라인 서점의 한계를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다.

더 깊은 지층으로 내려가 보자. 전포카페거리와 전기공구 상가 아래에서 포로수용소란 퇴적층이 드러난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속히 늘어가는 포로를 수용할 곳이 마땅찮았다. 전세 변동에 따라 수용소를 계속 옮기는 게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짓기로 한 시설이 바로 전포동 일대 서면포로수용소였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세워지면서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서면을 덮은 세월의 더께는 이토록 다층이며 두텁다. 하루 만에 끝낼 일이 아니다. 서면의 절반밖에 돌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도시철도 전포역 차량에 몸을 싣는다.

길라잡이·자료 제공=이성훈 선장

글·사진=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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