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0. 봉화 만산고택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후대까지 이어진 선비 정신… 5대에 걸친 '고고한 삶터'

만산고택 사랑채가 앉은 사랑마당 한쪽의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 끝이 별당인 칠류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봉화초등학교 정문에서 100m쯤 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면 40m쯤 앞에 막다른 골목이 보인다. 바로 만산고택(국가 민속문화재 제279호)의 행랑채 외벽이다. 별도의 담장 없이 외벽이 담장 역할을 하는 특이한 구조의 집이다.

영남 북부 갑부 문인 강용
을사늑약 후 벼슬 버리고 낙향
아들·손자 독립운동가 이름 날려

행랑채에 마루… '아랫사람 배려'
대청마루 한쪽엔 성주단지·채독
곳곳에 수없이 걸린 현판 '눈길'

■아들·손자까지 독립운동가 집안


만산(晩山)고택은 조선 말기 문인 강용(1846~1934)이 1878년 지은 집으로 지금까지 5대에 걸쳐 후손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만산은 강용의 아호. 만산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낸 강하규와 안동 권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백부 강한규와 유치유 양 문하에서 수학한 뒤 영릉참봉, 천릉도감 감조관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당상관인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만산은 아들 강필과 함께 치산에 힘을 기울여 영남 북부 8군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망국고신(亡國孤臣)의 한을 달래며 지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은 그의 시 '망미대'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슬프고 처량하여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다"고 한탄한 바 있다. 만산의 고고한 선비 정신은 아들과 손자 대까지 이르러, 강필 부자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완벽한 ㅁ자 평면 구성

만산고택은 크게 다섯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에는 11칸의 긴 행랑채가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다. 대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가 우뚝하고 그 뒤로 안채가 소슬하니 놓여 있다. 사랑채 오른쪽에는 서실이, 왼쪽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별채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행랑채는 방, 부엌, 마구간, 마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마루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고택을 방문했어도 행랑채에 마루가 딸린 집은 처음 본다. 아랫사람들의 휴식을 배려한 만산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칠류헌 툇마루와 원주의 검붉은 금강송(춘양목)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졌는데, 앞쪽에는 넓은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감실이 있다. 사랑마루 뒤편에는 작은 사랑방과 골방이 있다.

사랑채 오른쪽 벽면에 달린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곳간 같은 공간을 지나서 안마당과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졌는데, 앞쪽에는 넓은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감실이 있다. 안채는 ㄷ자 형태로 사랑채 뒤편과 이어져 안마당을 둘러싸며 완벽한 ㅁ자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구조는 1800년대 이후 봉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이 지역의 추운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건물을 완전히 폐쇄할 수 있다는 점과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툇간이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만산고택 안채 마루에 놓여 있는 채독.
사랑채 대청마루 한쪽에 성주단지가 놓여 있다. 과거엔 한 해에 처음 수확한 햅쌀을 단지에 가득 채워 넣어 1년간 보관했으며, 음력 5월 보름 낮 12시 성주신에게 차사(茶祀)를 지냈다고 한다. 또 한쪽에는 사리 독에 한지를 발라 만든 채독이 놓여 있다. 모시 삼베 등 풀 먹인 옷을 보관하던 용기다.

■우국충정 토로의 장, 칠류헌

다시 사랑마당으로 나와 쪽문을 통해 칠류헌으로 간다. 칠류헌은 흔히 만산고택의 백미라고 한다. 별당임에도 본채보다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데다 봉화에서 나는 금강송인 춘양목 부재들의 자연미가 압권인 때문일 것이다. 춘양목은 세월이 흘러도 부식이 거의 없고 속에서부터 검붉은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와 고택의 고풍미를 배가한다.

칠류헌 왼쪽에는 창고인 광이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과 대청이 연결돼 있다. 온돌방 뒤편에는 골방이 있고, 대청에는 짧은 판자를 가로로, 긴 판자를 세로로 놓아 우물마루를 깔았다. 방과 대청 사이 분합문을 올려 열면 40~50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만한 공간이 된다.

'칠류'는 두 가지 의미의 조합이다.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 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절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만산과 후손들은 이러한 상징 공간에서 선비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조국 광복의 방도를 고민했을 터이다.

만산고택은 '현판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고택 취재를 많이 다니다 보니 현판을 보면 그 집의 내력이 대강 읽힌다. 서실에는 書室(서실)과 翰墨淸緣(한묵정연)이, 사랑채에는 오른쪽에서부터 晩山, 靖窩(정와), 存養齋(존양재), 此君軒(차군헌)이 걸려 있다. 칠류헌에는 상단에 七柳軒, 하단 오른쪽부터 魚躍海中天(어약해중천), 四勿齋(사물재), 白石山房(백석산방)이 걸려 있다.

한묵정연은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을 뜻한다. 만산은 강용이 태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호이자 대원군의 필체다. 정와는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란 뜻으로 당대에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던 강벽원의 글이다.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는 의미의 존양재는 오세창의 글이다. '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사물재는 '예가 아니면 보려 말며, 들으려 말며, 말하려 말며, 행동하려 말라'는 <논어>의 네 가지 금지 덕목을 실천하려는 집이란 뜻이다.

■사람 냄새 나는 집

만산고택에는 만산의 5대손인 강백기(73) 선생과 부인 류옥영(66) 여사가 40여 년째 거주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만산고택에선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강 선생은 문화관광해설사를 자임, 방문객들에게 직접 고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만산의 5대손인 강백기 선생.
안주인 류 여사의 바지런한 손길이 배인 마당의 야생화는 내방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미나리아재비, 들깨덩굴, 미스김 라일락, 삼지구엽초, 는쟁이냉이, 흰꽃, 봄맞이꽃, 기린초, 우산나물, 조팝나무, 붓꽃, 사계국, 인디언 앵초, 매발톱, 붉은 바위취, 양지꽃, 토종 작약, 은방울꽃…. 류 여사는 직접 가꾼 야생화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소녀처럼 눈을 반짝인다.
안주인 류옥영 여사가 직접 빚은 질그릇들.
특히 류 여사의 도자기 실력은 전문가 수준이다. 오랜 종부 역할에 지칠 즈음에 만난 도자기는 그녀에게 '숨통'이 돼 줬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았는데, 도자기를 만들면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있구나' 하는 해방감을 느꼈어요." 사랑마당에는 야생화가 담긴 100여 개의 작은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마당 곳곳에도 야생화가 지천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마침 시집간 강 선생의 따님이 친정에 와 있었다. 두 살배기 이란성 쌍둥이 손자의 울음소리와 류 여사의 웃음소리가 섞여 집안 분위기가 더욱 활기찼다. 솟을대문 바깥까지 나와 기자를 배웅하는 강 선생의 환한 미소가 늦봄 햇볕처럼 따스하다. 오랜만에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뒤섞여 미래를 기약하는 고택다운 고택을 방문한 듯했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