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정효민 씨 "소비 아닌 관계 맺는 여행 꿈꾸며 '사람 지도'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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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로 여행하고, 커뮤니티로 일하는 '사람 지도를 만드는 맵퍼'. 정효민 씨는 소비 중심의 여행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여행 콘텐츠를 계속 고민 중이다. 정효민 씨 제공

'열심히 일한 당신'들은 일상탈출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디지털 노마드 시대. 출근이 없지만, 퇴근도 없는 프리랜서 정효민(31) 씨는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의 여행지는 유서 깊은 관광명소도, 핫플레이스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나.' 그는 이 궁금증 때문에 지구촌 곳곳 작은 공동체를 찾아다닌다.

2010년 '피스보트' 여행 계기
사회문제 여행으로 풀기 나서

현지 주민 삶 담은 여행잡지 창간
작은 공동체 방문기 등 집필 활동
마을기업·사회적기업 본격 공부도

"여행은 일상 탈출? 나의 편함 뒤에
누군가의 불편함 있다는 것 알아야"

아름다운 섬 세부에선 우붓 마을에 있는 '가치'를 사고파는 가게 '바와'를 방문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선 마을 비영리단체(NPO)가 만든 '히토 시고토 관'이 어떻게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는 커뮤니티로 여행하고, 커뮤니티로 일한다. 수많은 작은 공동체에서 보고 듣고 깨달았던 것을 기록하는 건 '기존 지도에는 없는 새로운 지도를 만드는 일'. 그는 '사람 지도를 만드는 맵퍼'(mapper)다.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여행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소녀.
사람 지도를 만드는 맵퍼. 그는 이 독창적인 직업의 밑거름을 2010년 국제 NGO '피스보트'가 주최하는 3개월 세계 크루즈여행 경험에서 얻었다.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피스보트는 평화와 인권, 환경보호를 위해 일하는 국제비영리단체. '사회문제를 여행으로 풀어낼 방법은 없을까.' 고민 많던 사회학도는 크루즈선 기항지 23개국에서 그곳의 사회문제를 들여다보고, 밤이면 배 안에서 열리는 '지구대학'에서 평화와 인권 여성문제에 대한 수많은 물음표의 답을 찾아 나갔다.

그는 69회차 피스보트 크루즈여행에 참가했다. 크루즈선은 올해 100회 출항을 앞두고 있다. 피스보트는 공동대표 200명이 함께 적자를 감당하며 35년을 이끌어온 단체. 출범한 1983년 20대였던 청년들은 어느덧 50대가 돼 여전히 활동 중이다.

그는 "여행은 환경,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담는 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여행지에서 여행객들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지역이 감수해야 하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코끼리 트레킹을 할 기회가 있었을 때 그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 참가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때의 마음 불편함은 아기 코끼리의 조련 과정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아기 코끼리는 눈을 가리고 귀를 찢긴 채 같은 길만 빙빙 돌도록 훈련받는다. 시간이 지나 야생성을 잃은 코끼리는 눈을 가리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같은 길만 가는 훈련된 코끼리가 된다. 태국 내에는 이 조련 과정에서 탈출한 코끼리들을 돌보는 야생 공원도 있다. 코끼리 트레킹을 하는 휴가가 있다면 이 탈출한 코끼리들을 돌보며 보내는 휴가도 있다.

여행은 일상탈출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의 편한 여행 뒤에는 누군가의 불편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정 씨는 "어떤 여행지에서 뭔가를 목격하고 깨달은 다음에는 그 경험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소비 중심의 여행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여행과 그 여행의 콘텐츠를 계속 고민 중"이다.

■커뮤니티로 여행하고 커뮤니티로 일하다

여행 책자들이 보여주는 여행은 그 여행지에 사는 주민들의 보편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관광명소와 숙소, 쇼핑, 맛집 정보만 넘쳐나는 여행 관련 책자들. 그는 '여행을 통해 자유를 얻었고, 행복했다'는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 버리는 것도 안타까웠다. 소비를 위한 여행 정보는 많은데 관계 맺기와 만남을 위한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교통 정보는 물론, 담당자는 누구를 만나면 좋은지까지도 꼼꼼히 알려주는 게 '먼저 갔던 사람의 예의'"라고 했다.

2012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청년 4명과 의기투합해 계간 <보편적인 여행잡지>를 창간했다. 여행으로 지역 이슈를 알아가는 법,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법 등을 발랄한 문체로 담은 <보편적인 여행잡지>는 '특별'했다. 제주에선 올레를 걸으며 강정마을에 들르고, 일본 교토에 가선 비정규직 천막 농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인심 좋은 지방에선 마을 어르신들께 반드시 인사하고, 소소한 일도 열심히 하라는 식의 공짜 숙식 팁을 알려주는 '민폐 여행' 특집, '공항에서 잘 자는 법' 등도 실었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다면 여기'라는 식으로 기존의 여행잡지가 알려주지 않는 정보가 가득했던 친절한 여행잡지는 3호 발간 후 휴간 상태다.

지금은 부산 수영구 마을잡지 <푸조와 곰솔>(반년간지)에 작은 공동체 방문기를 쓰면서 '사람 지도 만드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기업의 주민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초등학생들을 위한 마을 여행 기획 강의, 대안학교 학생들과 아시아 작은 공동체 여행 등도 한다. 그는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만나는 게 즐겁고,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재미와 그 즐거움을 계속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행, 새 삶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초등학생 대상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마을 여행 기획 수업 장면. 정효민 씨 제공
신영복 교수를 존경해 성공회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10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일본 오키나와 '히토 시고토 관'에서 일하는 마을 청년 다이스케 타카쿠라처럼 '사람과 일을 연결해 지역 문제를 돌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기업, 사회적기업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경영대학원에서 사회적기업 석사과정도 하고 있다.

그에게 여행은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구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다.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행복하지 않은 사회일지도 모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에서 여행이 임시방편의 해결책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 여행에선 다시 일상을 정비하는 힘을 얻으면 된다.

그가 생각하는 노동의 조건은 하던 일을 다 포장해 어딘가로 유연하게 떠날 수 있는 것.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는 "이름을 얻기보다는 오랫동안, 그러나 존재감 있게 여행하고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삶의 징검다리는 '보편적인일상프로젝트'(http://saydream88.tistory.com)에서 만날 수 있다.

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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