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이라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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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동아대 명예교수

"고구려, 그런 나라는 없었다. 중국 동북 변방에 고구려라는 한 소수 민족이 있었을 뿐이다."

25년 전인 1993년 8월 압록강변 옛 고구려 도읍지였던 시안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중국 산둥성 어느 대학 교수가 내뱉듯 던진 말이다. 중국의 오랜 '대국 근성', 그 민낯을 보인 순간이다.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완전 깡그리 부정한 것이다. 참석한 중국 학자 모두가 가세했다. 그러자 83세의 북한 원로 사학자 박시형 교수가 반론했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로, 현재의 역사는 현재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를 한(漢) 나라의 소수 민족 하나라고 보는 견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서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중국의 이런 시각은 '동북공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냈다. 이게 중국의 본심일 거다.

최근 번갈아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맞이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에게서 이 전통적 대국 '얼굴'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남한과 북한과 따로따로 가진 정상회담에서 또 다른 중국의 얼굴을 보았다. 북한에 대한 의전은 화려하고 성대했다. 그동안 양측의 서먹하고 불편했던 관계를 한 방에 날리듯 때 아니게 '혈맹'까지 다짐했다. 거기 비하면 한국에 대해서는 좀 소홀한 것으로 비쳤다.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한동안 북의 핵 개발을 마뜩잖게 생각했고 또 반대 의견을 밝혀왔다. 하지만 이번 양측 정상회담 발표에선 이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 말대로 혈맹 관계여서 그런 걸까.

중국이 한국에 서슴없이 드러낸 이런 민얼굴은 최근에만도 한두 사례가 아니다. 우선 사드 보복이 그렇다. 성주 사드체계 배치가 우리 안보에 치명적일 수 있는 북핵과 미사일을 감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중국 안보에 영향을 주는 건 전혀 없다고 우리 정부가 수없이 해명했다. 심지어 70여 년 이어온 미국과의 동맹 끈을 늦추는 이른바 '3불'까지 다짐했지만, 중국은 매정할 만큼 외면했다.

민간 기업 롯데는 중국 사업을 철수하고 수십 개 점포 문을 닫으면서 천문학적 손실을 보았다. 한국에 들어오는 중국 단체관광객도 완전히 끊겼다.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에 그 많던 유커가 홀연히 사라진 지 1년이 넘는다.

우리 국민과 정부가 놓쳐서는 안 될 더 중요한 대목이 있다. 오는 6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한반도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엄중한 시기를 코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김정은을 불러 다독이면서 한국에는 이른바 '쌍 중단'과 '쌍궤병행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북한의 북핵·미사일과 한·미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것이다. 북핵 폐기를 위한 국제적 압박 공조마저 흔들리고 있다.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고 좀 더 당당하고 자존감을 보여줄 때 중국은 우리를 '소국'으로 보지 않는다. 먼저 숙이고 들어가면 우리는 중국 앞에서 늘 작은 존재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다. 이웃 중국을 멀리하거나 적으로 만들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국가 운명을 앞장서 짊어진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더욱 그렇다.

지난달엔 남중국해에서 중국군 함정 48척 군용기 76대를 동원한 이례적인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진핑 주석이 사열했다.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

안보와 경제에는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는 낙관이나 안이한 자세는 한 치도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민낯을 새삼 제대로 그리고 다시 한번 살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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