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원의 영화와 삶] 시네마틱한 감각의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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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은 영화가 절반을 지나는 지점까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50년의 시차를 두고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가 교차되지만 둘 사이의 서사적 접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스타일로도 서로 다른 두 편의 영화가 우연한 실수로 한 편의 영화 안에 뒤섞인 듯 느껴진다. 1920년대의 소녀 로즈의 이야기가 흑백 무성영화로 전개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컬러 유성영화로 바뀌어 70년대의 소년 벤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식이다.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자면, 두 아이 모두 청각장애인이며 집을 떠나 홀로 긴 여정에 오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로즈는 무성영화 스타인 엄마를 만나러, 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빠를 찾아서 뉴욕으로 향한다. 우리의 서사적 기대가 비로소 형태를 갖추고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지점도 이쯤이다. 이제, 두 아이는 뉴욕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렇게 정리한 서사를 따라 그들이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자 뜻밖에도 실망감을 표하는 이들이 보였다. "에이, 별 얘기도 아니네." "뻔해." 스크린에 절반쯤 몸을 담그고 거의 넋을 잃은 채 영화를 보았던 터라 내가 감독인 양 그 짧은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뻔하다고? 별것도 아니라고? 어쩌면 서사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내 혼을 빼놓았다면 그건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서사 바깥의 시네마틱한 요소들 때문이다.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
시네마틱한 감각 일깨우며
소설의 불완전한 축소판 아닌
대체 불가능한 영화 매력 발산

한때 아이였지만 아이 이해 못 하는
어른에게 추천하고픈 5월 영화


영화 개론서의 첫 장에 나오는 얘기, 영화는 서사와 이미지와 사운드의 예술이다. 이야기하기로는 문학에 미치지 못하며, 보는 것으로서는 회화를 넘어설 수 없고, 듣는 것으로는 음악보다 한참 부족하지만, 영화는 그중 어느 것과 겨루는 대신 그 모두를 통합한 20세기 예술이다. 문학과 회화와 음악, 그 각각에 미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이 영화다. 사진, 건축, 무용, 연극, 오페라, 철학, 과학까지 끌어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 말의 진의는 예술 간의 우열 관계를 가리자는 데 있지 않고 다만 영화예술의 복합적인 측면을 환기하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영화에서 이야기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영화 매체가 지닌 다른 예술적 측면들을 간과하곤 한다. 그럴 때 영화는 한두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소설의 불완전한 축소판이 되고 마는데, 이를테면 '원더스트럭'의 경우 이야기로 따지면 600쪽이 넘는 원작의 방대한 스토리를 2시간이 채 못 되는 러닝타임에 가지 쳐서 구겨 넣은 앙상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넘어서기 힘든 것이다. 영화는 곧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사람들 간의 소통에서 생겨나며, 소통은 말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원더스트럭'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소리와 색채가 없는 영화의 시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거대한 이미지의 전시장인 박물관과 미술관, 영화관이라는 공간, 활자로 옮겨지고 손짓으로 시각화된 대화, 영화 속 영화로 등장하는 가상의 무성영화, 그리고 환상적으로 구현된 뉴욕의 디오라마까지 토드 헤인즈는 눈과 귀의 시네마틱한 감각을 일깨우는 장치들을 여기에 총동원한다. 그리하여 (묵음까지 포함한)듣는다는 것과 본다는 것의 감각을 극대화해 그것을 새로이 체험하게 한다. 스토리로 환원되지 않는, 책으로 대체 불가능한 영화의 매혹이 여기에 있다.

첨언: 그런데, '시궁창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던' '원더스트럭'의 그 아이들처럼 용감하고 경이로운 존재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는데 왜 자라고 나면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일까. 시네마틱한 감각적 경험은 접어 두고라도, '원더스트럭'은 한때 아이였던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5월의 영화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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