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남북 관계와 속도전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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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속도는 공간과 시간을 매개하는 중요한 물리량이다. 시간에 대한 위치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주목할 것은 속도는 방향이 있는 벡터양이라는 것이다. 흔히 빠르기의 의미만이라면 '속력'이라는 방향이 없는 크기(스칼라) 양을 사용해야 옳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방향이 잘못돼 있으면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므로 '속도'라고 따로 구별하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빠르기'라면, 우리는 자동차의 속력계나 과속단속기가 보여 주는 숫자로만 생각하겠지만, 박찬호의 강속구가 시속 150㎞ 정도임을 감안하면 시속 100㎞를 넘어 달리는 것은 사실상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에 올라탄 것과 같다는 느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시속 1000㎞로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는 총알의 속도와 맞먹으며, 그 비행기로도 40시간이 걸리는 지구 둘레를 우리는 24시간에 한 바퀴씩 어김없이 돌고 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지금도 시속 2000㎞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조차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긴 이 세상에 정말로 멈춰 있는 것이 있기나 하랴. 세상 만물은 제법 빠른 속력으로 쉼 없는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물질들 속에도, 빠르게 진동하는 분자들이 꽉 차 있다.

단순한 빠르기의 속력과 달리
속도는 '방향'이 중요하다

공간 통해 운동하는 물질보다
그것을 전달하는 '매질'이 관건

여러 요인 얽힌 남북관계 속도
올바른 지향, 차분한 행보 소중


또한, 전류가 흐르는 도선 안에 있는 전자들이 1초에 1㎜도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전기는 모름지기 빛의 속도로 흐르는 것이거늘, 도선 안에 있는 전자가 1초에 1㎜도 흐르지 않는다는 게 무슨 얘기일까? 소리의 속도는 또 어떨까? 1초에 수백m를 간다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의 속도일까? 우리가 말을 하거나 노래를 할 때마다 초속 수십m의 태풍보다도 10배 이상 더 강한 바람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것이 실제 이동하거나 그렇게 보이는 것만 '속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사실 자연계에는 실제 공간을 가로지르는 운동보다도, 서로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운동이 훨씬 더 많다. 실제 도선 내에 있는 전자는 아주 느리게 조금씩 움직일 뿐이지만, 그 움직임은 아주 빠른 속도로 바로 옆에 도열하고 있는 전자들에 '전달'된다. 그래서 전기가 빛의 속도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소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압력을 받은 공기분자들이 거의 그 자리에서 진동할 뿐이지만, 그 작은 움직임들은 옆에 있는 이웃 분자들의 진동을 통해 초속 300여m의 속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속도'는 순전히 '전달'을 담당하는 '매질(Media)'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 매질이 가볍고 탄력도가 높을수록 속도는 빨라진다. 최초 소리가 시작될 때의 압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큰 소리를 낸다고 빨리 전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랫동안 반대 방향으로 내달려 일촉즉발의 파국으로만 치닫던 남북관계가, 어느새 봄날에 얼음 녹아내리듯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남북의 두 정상은 '속도'를 그렇게 중요시했다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생각할 때, 고착화된 지 65년이나 되는 남북관계라는 것이 남과 북의 의지에만 달린 것도 아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고, 아직도 아슬아슬한 살얼음판과도 같은 여정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엄중한 국면에, '속도'의 중요성을 달리 바라볼 것은, '빠르기'만 재촉한다는 의미보다는 올바른 지향점과 방향을 갖고, 작아 보이더라도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행보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차분하고 정확한 움직임이 굳이 요란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속도는 매질이 되는 남북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국민들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각종 매체들에 달려 있다. 그 무게감이나 탄력도는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오랜 세월의 내공이 축적된 문화와 시대의 산물일 뿐이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우리 국민 각자의 작은 움직임들은 아주 중요하다.

해묵은 몽니 같은 억측도,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도, 어느 것도 모두 요란스럽다.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신중하고도 차분한 바람과 작지만 정확한 움직임들을 부지런히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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