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에서 평화수도로] 4.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현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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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태극기 한 번도 안 걸려… 부산 속 '외세 지배의 상징'

부산근대역사관은 외세 지배와 주둔의 상징이자 한국근현대사 치욕의 상흔이다. 사진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20년, 미국 산하 미 24군단 제40사단 숙소 및 미국대사관과 부산 미문화원 50년…. 1929년 지어진 이래 1999년 우리나라에 완전히 반환되기까지 무려 70년간 부산 땅에서 태극기가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한 건물이 있다. 외세 지배와 주둔의 상징이자 한국근현대사 치욕의 상흔 '부산근대역사관'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 중심지
해방 이후 미군에게 건물 넘어가

한국전쟁 땐 미국 대사관 활용
휴전 이후 미 문화원 기능 회복

80년대 방화사건 등 '반미' 상징
시민 반환 운동 1999년 돌려받아

■수탈의 중심지에서 국제외교 무대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 됐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특수법에 따라 지난 1908년 서울에 처음 설립된 국책회사로 이후 전국 곳곳에 지점이 만들어졌다. 부산지점의 출발점은 1909년 11월 세워진 마산출장소다. 남윤순 피란수도 부산유산 유네스코 등재 기록화연구팀 연구원에 따르면, 마산출장소는 1920년 4월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지점으로 승격했으며 1921년 11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산부 영정 2정목 2번지(현재 중구 중앙동 4가 76-8일대 추정)로 자리를 옮긴다. 1929년 9월 초량왜관 일대였던 지금 부산근대역사관 자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 지어지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수탈자본이 빠져나가는 관문이기도 했던 부산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 1920년대 말에야 지어진 것은 경남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1925년 부산(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으로 옮겨오면서 행정과 함께 발맞춰나갈 회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76년 국내 첫 개항 이래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된 셈이다.

1960~1970년대 부산 미문화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의 운명은 또다시 격동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을 통치하는 유일한 권력이었던 미군에게 건물이 넘어가면서 미군 숙소에 이은 부산 미문화원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건물은 여전히 미군의 손에 있었고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대사관이 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피란수도 부산 시절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관 기능을 했던 건물은 미국이 유엔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면서 국제 외교의 중심지로 거듭났으며, 임시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해외 기관들이 근처에 몰려들게 됐다. 국내 중앙 부처까지 모여들면서 건물이 있던 대청로 일대는 서울 '광화문의 축소판'이 됐다. 김기수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외교 공간으로 전용돼 치열한 외교의 최전선을 이룬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말했다.

■온전히 우리 품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휴전 이후 서울로 미국대사관이 옮겨간 이후엔 미문화원 기능을 회복하면서 40여 년간 시민들과 소통했다. 도서대출을 비롯해 어학연수 등 정보제공 서비스, 문화프로그램 등이 제공됐으며, 결혼식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은 약통에 쓰인 영어의 뜻을 물으러 미문화원을 방문하는 등 민간 교류의 장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수십년 간 무상으로 건물을 사용한 문제가 불거졌고 1980년대 들어서는 한미불평등 관계의 상징적 건물로 낙인찍혔다. 반미 무풍지대로 여겨온 남한에서 처음 일어나 반미운동의 상징이 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1982년 발생하는 등 갈등과 부침을 겪다가 1996년 미국 연방정부 예산삭감 조치에 따라 폐쇄됐다. 이후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부산아메리칸센터 건물반환 범시민추진위원회'가 조직돼 적극적인 반환 운동이 펼쳐졌고, 1999년 우리나라 정부에 반환되면서 70년간에 걸친 치욕이 비로소 씻기게 됐다. 최정혜 부산근대역사관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이 점령하면서 건물에는 일장기에 이어 미군기가 올라갔다. 1999년 반환 이후 태극기가 휘날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현재의 부산근대역사관 전경. 부산근대역사관 제공
2001년 부산시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된 데 이어 2003년 부산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미국대사관, 미문화원으로 이어진 근현대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게 됐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다. 2020년 하반기 개장 예정인 부산근현대역사박물관과의 역할 분담과 청자빌딩 등 주변의 근대유산과의 연계성 확보 등이 대표적이다. 김 교수는 "당초 피란수도로 오키나와와 괌, 제주도도 거론됐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지 않고 부산에서 3년을 버티면서 우리나라를 지켜낸 것"이라며 "부산이 가진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게 피란수도 부산의 진정한 목적이다. 부산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출발점이 바로 피란수도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공동기획/ 부산일보·피란수도 부산유산 유네스코 등재기록화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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