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솔개, 푸른 바다로
/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이보소, 좁쌀영감. 굴 껍데기처럼 웅크려 좀처럼 펴지지 않는 귀하의 어깨를 볼 때마다 작년 겨울 토요일 새벽의 일이 기억나오. 당신이 어둠 속에서 조심스레 우리 검도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난 얼마 전에 보았던 러시아 영화 '파우스트'의 첫 장면을 문득 떠올렸다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지만 한국에선 겨우 몇 명의 관객만 모은 채 쓸쓸히 퇴장했던 그 영화 말이요. "아아! 평생 학생 놈들 코를 잡고 이리저리 뒤틀며 쥐어짜 보았지만/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그래, 불쌍한 나란 놈은 그을음과 해골에 둘러싸인 음산한 감옥에 갇혀 있구나." 당신을 본 순간, 좀먹고 먼지 쌓인 책들 틈에서 쇠잔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대는 백발노인 닥터 파우스트가 영화 속에서 기어 나온 걸로 착각했지 뭐요.
검술의 기본은 바른 자세에서…
무사는 '삼물짜' 정신 되새겨야
노경에 이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근데 오해는 마소. 뭐 당신이 철학, 의학, 법학, 게다가 신학까지 속속들이 연구한 전설의 파우스트 같은 만능의 천재라는 말은 결코 아니요. 괴테의 원본 희곡에 나오는 대로, "이런 꼴로 삶을 더 이어간다는 것은 멍멍이라도 싫다 할 거다"라는 독백이 바로 딱 어울리는 주인공을 만났구나 하는 느낌이 언뜻 든 거뿐이외다. 동시에 50년 검술 연마에 몸 바친 이 몸이 기꺼이 메피스토펠레스가 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은 바로 당신의 구부정한 어깨 때문이었소이다. 난 도저히 그런 꼴은 못 보는 사람이며, 검술의 기본은 바른 자세로부터 나온다는 게 내 소신이오. 그래서 영감태기를 볼 때마다 "당당!"이라고 외치며 사정없이 죽도로 등짝을 치는 것이니 달리 원한을 품지는 말구려. 선정(禪定)에 든 스님들도 졸다가 죽비로 무자비하게 어깨를 맞지 않소이까.
자, 대문호 괴테의 말처럼 그대는 지금 "신비가 가득 담긴 노스트라다무스의 책을 길잡이 삼아 드넓은 세상으로 뛰쳐나왔소." 육십 년 공부하고 사십 년 가르친 문(文)의 세계를 떠나 평생 한 번 기웃거려 본 적도 없는 무(武)의 광야로 혈혈단신 뛰어들었으니, <시경(詩經)>을 살짝 비틀자면, 멸치가 하늘로 비상하고 솔개가 바다로 점프한 셈인 거요. 그러나 정말 잘했소. 검을 잡는 순간, 당신은 회춘은 물론 사람 사는 보람을 흠뻑 느낄 게 틀림없소. 이제 무사가 취할 지상의 양식(糧食)을 내가 일러줄 터이니 귀담아 잘 들으시오.
모름지기 무사의 법도는 짜지 않고 짜지 않고 짜지 않는 거외다. 뭔 황당지사(荒唐之辭)를 썰[說]하냐 할지 모르지만 이 '삼물짜'는 무사는 물론 우리 같은 노경(老境)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행동준칙까지 아우르는 일대 문자이니, 요즘 젊은 분들이 알지 못할 준말들을 하도 잘 들여대기에 나도 못 할 게 없다 하고 한번 창작해 본 거요. '삼물짜'란 물훤(勿훤)·물인(勿吝)·물착(勿搾), 즉 어린애처럼 징징 짜지 말고, 재물에 짠돌이 짓 말고, 사람들을 코너에 몰아 쥐어짜지 말라는 게 요지외다. 일본 무사를 인용해서 좀 안됐지만 불패의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가 만년에 '독행도(獨行道)'를 통해 서술한 자기수양론이나, 연애편지 대필로 유명한 프랑스의 코보 검객 시라노가 실천한 자기희생의 대로망도 기실은 그 근저에 이 늙은 한국의 검사(劍士)가 발명한 삼물짜의 정신이 바탕하고 있음을 어이 부정할 수 있겠소.
귀하께서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 칼을 잡았으니, 장차 달밤에 혼자 진주검무나 동래깨춤을 추실지, 혹은 정월 대보름날 태백산 장군봉에 올라 천하의 검객들과 일합을 겨룬 후 한고조의 무장 번쾌처럼 도야지 앞다리를 쓱쓱 베어 칼끝에 꽂고 말술을 들이켤지 기약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오. 다만 평생을 해로한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짬보·찡찡이·삼식이·도척이 소리를 들으며 혼자 방구석에서 회한을 되씹는 불상사는 없어야겠지요. 또한 제 주제는 생각 않고 제자들을 공부 못한다고 그리 쥐어짰으니 이제 검을 곁에 놓고 잘못을 묵상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소? 아아!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