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패터슨의 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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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 남긴 여운이 길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평생 소아과 의사로 살면서 시를 쓴 미국의 시인이다. 그의 시집 '패터슨'은 자전적인 인물인 패터슨 박사를 내세워 고향인 뉴저지 패터슨을 노래한다. 영화 '패터슨'에는 패터슨에서 버스 운전사로 살면서 시를 쓰는 패터슨이 등장한다. 이로써 감독의 의도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영화로 불러내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윌리엄스를 따라 그의 생애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읽고 시를 쓴다. 그만의 공간인 지하 서재에는 시인 윌리엄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데이비드 소로, 잭 런던, 월러스 스티븐스 등의 책들과 함께 여러 판본의 시집 '패터슨'들이 산재한다.

공책은 많은 가능성 지닌 장소
명성보다 진실한 마음의 삶 욕망
시는 무의 바탕 위 생동하는 생명

확실히 영화의 주인공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추앙하고 모방한다. 시를 쓰는 감독인 짐 자무시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 이 영화가 감독의 작위임에 분명한 여러 패터슨들의 병치로 얻으려는 효과는 무엇일까?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에세이 <내 방 여행하는 법>과 같은, 미시적이고 섬세한 정신을 부각하려는 염원일까? 아니면 추상화되는 삶으로부터 구체적인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일까? 이도 아니면 진정한 삶의 양식에 대한 갈망일까? 어떤 이들은 아내 로라의 모습을 들면서 삶에서 새로움의 가치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실내 디자인을 거듭 바꾸고 수제 쿠키를 만들어 내다 팔면서 기타를 배워 컨트리 싱어가 되려고도 하는, 로라의 행위에 이름을 얻고 부를 획득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고 한다면,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시를 쓰는 패터슨은 무상의 욕망을 지녔다는 해석이다.

시를 써 둔 공책을 반려견 마빈이 찢어 놓은 이후에 패터슨은 점심시간에 자주 들르는 폭포가 있는 공원으로 간다. 사라진 시편들에 대한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배회이다. 이 대목에서 돌연하게 일본 시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주목된다. 이 영화가 '와비 사비 라이프'와도 무연하지 않음을 말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 그가 전해 준 공책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타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미세한 삶의 숨결을 기록한 시편들이 담긴 공책은 사라졌지만 다시 여백으로 가득한 새로운 공책이 패터슨의 손에 들리게 된다. 공책은 비어 있음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장소이자 무에서 유가 발현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패터슨에게 주어진 공책의 의미가 중요하다.

만일 패터슨이 시집이라는 성과를 통해 부와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 그는 당장 우울증에 빠졌을 공산이 크다. 성취와 자기전시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나르시시즘의 우울증은 엄습한다.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우울증을 낳는 것이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라고 한 바 있다. 남과 다른 시를 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시인이라면 공들여 써 둔 시편들이 담긴 공책이 사라졌을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정과 성공의 문턱이 파괴된 탓이다. 하지만 시집으로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시를 쓰면서 진실한 마음의 삶을 욕망하는 패터슨은 결코 절망하거나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 시는 생성하는 무(無)에 가깝다. 텅 빈 공책과 같은 마음에서 나온다.

공책이라는 사물 현상이 말하듯이 시는 무의 바탕 위에서 생동하는 생명의 과정과 같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호명한 의미가 공(空) 혹은 무위 사상과 연관이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의 영화로 인하여 뉴저지 패터슨이 뜨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순례가 이뤄지는 장소가 되길 기대할망정 스쳐 지나는 비장소로 전락하길 그가 원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공책이 사라지고 컴퓨터와 휴대폰이 노트가 된 시대에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 이야기가 한갓 희귀한 화제로만 그칠까? 아니면 그를 통해 잃어버렸거나 놓친 인간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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