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문화 톺아보기] 29. 보림극장 철거를 보며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영화 기억 지우는 '영화도시 부산'

보림극장 건물이 철거되는 장면.

"또 하나의 추억은 갔다." 마치 오랜 친구가 떠나가는 기분.

누군가는 "이로써 내 청춘이 몽땅 사라졌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범일동 '극장 트리오'의 주역. 1968년 신축 개관해 수십 년간 한자리에서 서민들의 친구가 되어 준 부산 동구 범일동 보림극장 건물이 헐리고 있다. 그 자리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거란다. 1990년대 들어 조금씩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극장 문을 닫은 후, 이 건물은 그동안 임대 상가로 운영됐다. 그 남아 있던 극장 건물이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지만, 애잔하고 애틋하다.

누군가에겐 "내 청춘은 여기서 시작돼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는 곳. 잘 나갈 땐 삼일, 삼성과 함께 '범일동 극장 시대'를 화려하게 열어젖혔던 곳. 1970년대까지 영화 상영과 함께 구봉서, 배삼룡, 하춘화 같은 당대 최고 인기스타의 공연을 여는 지역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던 곳. 그렇게 부산에서 잘나가는 극장이었다.

2006년엔 삼일극장, 2011년엔 삼성극장이 그 사라짐으로, 우리의 가슴을 후벼 놓았다. 이 싱그러운 3월 봄꽃 향기 속에서, 누군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는 이 극장을 보며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일 터이다. 

1970년대 인기스타의 공연장으로 사용될 때의 보림극장 모습. 연합뉴스

영화 이야기가 샘솟는 곳, 그 가치가 숨 쉬는 곳. 손때 묻은 정겨운 공간이 있는 곳. 그래서 우리는 부산을 '영화의 도시'라 부른다. 이 말 속에는 영화에 대한 부산의 자존심이 짙게 깔려 있다.

그 자존심의 기저엔 '과거'가 있다. 1924년 국내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일제 강점기에는 22개의 극장이 있었을 정도로 일찍부터 극장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삼일, 삼성, 보림이 있었기에, 감히 지금 우리는 '영화 도시 부산'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부산이란 도시는 지금 영화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 지워가고 있다. 영화에 대한 정겹고 애틋한 기억들을 지워가는 도시를 어떻게 영화의 도시라 할 수 있는가? 너무나 낯부끄럽다. 이게 바로 이 도시의 문화·예술 수준이란 말인가?

이젠 부산도 달라져야 한다. 미래 자산이 눈앞에서 사라지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지자체와 시민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야기가 있는 도시, 추억이 남아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도시는 새것 전시장이 아니다.



보림극장의 운명과는 달리, 서울에선 운영난으로 올해 1월 폐관했던 극장이 근래 다시 문을 연 경우도 있다. 바로 정동 세실극장이다. 서울시는 1976년부터 정동을 지켜온 세실극장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보고, 극장을 5년 이상 장기 임차한 뒤 비영리단체에다 운영을 맡겨 재개관하기로 했단다. 시민 세금으로 재개관하게 된 세실극장은 공공 공간으로 개방된다. 옥상을 휴게 공간으로 꾸미고 카페 등 편의시설도 들일 계획이라니 부럽다. 이곳에서 연극 공연도 이루어지고, 워크숍이나 전시 등 다양한 행사도 개최할 거란다.

왜 부산은 못 할까.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도시에 있어 뭔가 새로운 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기존의 도시가 지니고 있는 아우라를 문화·예술의 끈으로 엮어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늘 기존의 기억들을 순식간에 없애버리고 나서야 그 지워버린 것에 대해 때늦은 후회를 하곤 한다.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현상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도시가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낭만과 로망이 필요하다. 고즈넉한 울림, 인간의 잃어버린 감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부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깃든 도시라면, 그 도시의 가치도 분명 함께 올라갈 것이다.

그래도 새것 타령이라면….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로운 가치로 만들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된다"고 했다.

dosol@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