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정치파동] '통합의 정치' 대신 '일방의 정치'가 야기한 상징적 사건
/전성현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교수
한국전쟁기에 부산으로 수도를 이전한 '피란정부'가 수립한 정책들은 다양한 견해와 의견을 수렴한 통합의 정치가 아니라 일방적인 정치로 추진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했다. 피란수도 시기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전쟁의 극복을 권력의 유지로 이용한 피란정부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위해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제기했다. 반면,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 피란정부의 실정을 익히 알고 있는 '피란국회'는 이를 부결시키고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주장했다. 피란정부는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 1952년 실시된 최초의 지방선거를 통해 민의를 직선제로 조장했다. 이어서 5월 25일 부산과 경남 등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26일 정부청사로 들어오는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가로막고 국회의원 48명을 구금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이 피란수도 정부청사 앞에서 벌어졌다.
피란정부의 수도 이전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던 미국과 유엔도 이 파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국회의원을 구금한 후 피란정부는 공보처를 통해 "국제적인 비밀공작으로 공산당의 자금을 받아서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반면, 미국공보원의 '미국의 소리'와 유엔 파견대에 의한 중앙방송국은 "정부 자료에서 나온 보도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믿을 만한 보고에 의하면, 오전 현재 국회의원 8명이 투옥되었고, 43명이 구류되었다"고 정부 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당연히 미국과 유엔의 이와 같은 방송은 내정간섭임을 피란정부는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대사관과 유엔통일부흥위원단은 방송과 회담을 통해 계엄령 해제와 구금한 국회의원의 방면을 지속해서 주장했다. 이 같은 대치가 지속되자, 피란정부와 유엔사령부 간의 긴급한 회담이 대통령관저에서 이루어졌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구현보다 성공적인 전쟁 수행을 최우선으로 여긴 미국 정부와 유엔사령부는 피란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한편,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방면을 요구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피란정부에 의해 '부산정치파동'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