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언어' 삶을 담아낸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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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언어/한성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희망을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로 꼽히는 '희망가'의 첫 소절이다. 1923년 음반으로 발매된 이 노래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에서 부녀지간으로 출연한 황정민과 김수안이 엔딩곡으로 부르면서 화제가 됐다. '풍진(風塵)'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 혹은 어려운 세상의 어려운 일을 뜻하니 '풍진 세상'은 어려운 현실을 뜻한다. 제목과 노랫말에 '희망'이란 말이 들어가지만 구슬프고 축 처지는 곡조라 외려 젊은이들이 들으면 삶을 비관할 것 같다는 걱정에 '청년경계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창작곡이 아니라 일본의 '새하얀 후지산 기슭'이란 노래의 번안곡인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한 세기 걸친 유행가 노랫말 통해
삶·사랑 등 그 당시의 문화 분석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 '희망가'
아이돌 '방탄소년단' 노래까지
노래방 책 등 2만 6250곡 모아

"노랫말, 죽은 단어의 조합 아닌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아"

<노래의 언어>는 한 세기에 걸친 유행가 속 노랫말 속에서 우리의 삶과 사랑, 시대의 단편을 불러내는 책이다. 국어학자로 현직 대학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인 저자는 "노랫말은 죽어 있는 단어와 문장의 조합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며 "노래로 불리기 위해 다듬어진 말이고, 부르고 듣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것이 노랫말"이라고 역설한다.

노랫말 정리를 위해 저자가 사용한 방법이 재미있다. 국내 최대의 노래방 기기 제조업체인 T사의 홈페이지 등을 활용해 '노래방 책' 등에서 2만 6250곡의 노래를 모았다. 대상은 1923년 '희망가'부터 2016년 노래까지 망라했는데 제목만 원고지 2600매, 가사는 7만 5000매에 달할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언어 형태소분석기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의미와 특징을 분석했다고 한다.

책은 '노래' '말' '사람' '삶' 등을 키워드로 모두 4부로 구성된다. 책장을 넘기면서 분석결과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꽤 많다. 흔히 '노래=사랑타령'으로 여기지만 가사에서 '사랑'을 압도하는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나'와 '너'(표 위)이다. 책은 이를 통해 노래에 대한 정의를 "1인칭이 2인칭에 들려주기 위한 것" "나와 너의 이야기"로 정의한다. '사랑'은 일상생활에서는 사용빈도가 104위에 그쳤지만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서는 인칭대명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가요에서 최초로 사랑이 등장한 노래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읊은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1926년)이다. '사랑'이 쓰인 노래를 시대별로 분석해보면 1950년대까지는 전체 노래에서 고작 2.19%에 그치지만 2000년 이후에는 11.03%까지 높아진다. 여기에 '러브'와 'love'까지 합치면 비율은 무려 65.22%로 상승한다. 자작곡에서 '사랑' 비중이 가장 높은 작사가는 SG워너비였다.

노래로 가장 많이 불린 시(詩)는 누구의 작품일까. 김소월이다. '개여울'(김정희, 1967),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1978)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1979) '진달래꽃'(마야, 2003) 등 김소월의 시를 사용한 곡이 유독 많았다. "김소월은 우리 시가의 전통적인 음보율을 자신의 시에 잘 반영했으니 그의 시가 노래로 많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한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직접 가사를 쓴 '팔도강산'(2013)에 대한 언급도 재미있다. '서울 강원부터 경상도 충청도부터 전라도 우리가 와 불따고 전하랑께…'며 사투리로 시작하는 노래는 '결국 같은 한국말들 올려다봐 이렇게 마주한 같은 하늘'로 마무리해 나름의 '통합'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들어 "방탄소년단에게 상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노랫말에서도 '서울 중심주의'는 관철되고 있었다. '서울'은 제목과 가사, 말뭉치(언어 연구를 위해 컴퓨터가 읽고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언어자료)에서 2위 '부산'을 압도했다(표 아래). 제목 상위 10위 안에 '부산'과 함께 '해운대'가 포함된 것이 눈길을 끈다.

노래는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래 속 연정의 대상은 '선생님'에서 '오빠'로 바뀌었고 '역(驛)'은 이별의 장소에서 만남의 장소로 변모했다. 하지만 소위 '다방 커피'가 '아메리카노'로 변하는 동안에도 '술'은 시대를 관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한 잔'으로 변함이 없었다.

노랫말의 '표준어'는 무엇일까. 책에 따르면 노랫말의 표준은 '젊은 세대'의 말이다. 지금의 '나이 든 세대'가 사랑하는 노래도 결국은 자신의 젊은 시절 노래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후의 명곡' '슈가맨' 등의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는 지점도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고 '응답'하게 하는 데 있다. 그 노래가 세월이 지나 '흘러간 노래'가 되고 노랫말이 '시간 방언'이 되더라도 당대에는 '최신곡'으로 가장 새로운 말을 담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놓치면 노래와 노랫말의 차이를 세대 간의 갈등으로 보게 된다"고 지적하며 "말과 노래는 늘 변하기 마련이고 그 변화는 젊은 세대가 주도한다"고 강조한다. 한성우 지음/어크로스/364쪽/1만 6000원.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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