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6. 경주 교동 최씨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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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춤의 미덕, 건축의 미학이 되다

교동 최씨고택 안채의 평면 구성은 ㄷ자형에 중문간채의 일자형이 더해 ㅁ자형 구조를 이룬다. 중문간채에서 바라본 안채 모습.

경북 경주 월성 서편 교동(校洞) 마을에 있는 '최씨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종택이다. 최 부자 댁은 익히 알고 있듯이 '12대 만석꾼, 8대 진사'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가다. 특히 해방 이후 전 재산을 대학 설립을 위해 내놓은 최 부자의 기부 정신은 사회 환원의 전범으로 회자된다.

최 부자 집을 찾아간 날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꽃샘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평일이어서 찾는 발길이 거의 없었다. 한적함 속에서 최씨고택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전 재산 사회 환원한 최 부자 종택
건물 또한 곳곳에 겸손의 흔적들
인근 향교보다 다섯 자 낮게 건축

아쉽지만 숙박 프로그램은 없어

■곳곳에 겸양의 흔적이


최씨고택은 문간채, 큰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집 솟을대문은 일반적인 고택의 그것보다 낮고 수수하다. 여기서부터 최 부자의 겸손이 느껴진다.

문간채와 정면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큰 사랑채가 우뚝하게 서 있다. 큰 사랑채는 1970년 화재로 전소됐다가 2006년 복원됐다. 복원한 건물의 나무 부재들이 아무래도 세월의 흔적을 머금지 못해 고풍스러운 맛은 떨어진다. 큰 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에 네모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을 얹었다. 큰 사랑채 마당에 올림픽 성화대처럼 생긴 것은 명료대(明瞭臺)인데, 밤에 불을 밝히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ㄱ자형 누마루가 시원스럽다. 마당에는 아담한 화단이 조성돼 있는데, 노란 산수유 꽃이 먼저 봄을 알린다. 과거 신라의 어느 사찰에서 사용했을 탑재와 주춧돌이 산재해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큰 사랑채에는 면암 최익현, 의병장 신돌석, 백산 안희제, 의친왕 이강 공, 스웨덴의 구스타브 국왕(당시 왕세자)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머물다 갔다.

큰 사랑채에 붙은 편액도 눈여겨보자. 대우헌(大愚軒)과 둔차(鈍次).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과 '재주가 둔한 2등'이란 뜻이다. 대우헌은 최준의 조부인 최만희의 아호이고 둔차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호다. 겸손이 이 집의 내력임을 잘 보여 주는 단면이다.

마당 왼쪽(서쪽)에 잘 생긴 장대석 기단과 주춧돌 등이 놓여 있는 정원이 있다. 이곳은 본래 작은 사랑채가 있던 자리인데, 화재로 소실돼 흔적만 남았다. 문화재청은 올해 이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건물은 마당 오른쪽(동쪽)에 늠름하게 자리 잡은 곳간채다. 곳간채는 곡식을 넣어 두는 만큼,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원활하도록 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박공 부분인 지붕 양쪽 옆면에 바람막이 판인 풍판을 달았다. 고풍스러운 멋이 두드러진다. 곳간채 하단은 판벽으로 돼 있고, 상단은 통풍창과 회벽으로 돼 있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최고의 곳간 건물이다. 만석지기의 위용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비밀 통로인 쪽문.
사랑채 누마루 아래를 왼쪽으로 돌아들면 중문이 나온다.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그러나 여성 공간인 안채는 쉽게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중문 전면에 나무 판벽을 두어 살짝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게끔 했다. 안마당에 진입해서도 역시 방해물은 있다. 장독대가 그것. 장독대에 눈길을 한참 뺏긴 후에야 안채로 눈길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아뿔싸, 일제강점기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장독대와 높은 굴뚝의 붉은 벽돌이 주는 이질감이 눈에 거슬린다.

안채의 전체적인 평면 구성은 트인 ㅁ자형이다. 안채의 ㄷ자형에 중문간채의 一자형이 더해 ㅁ자형 구조를 이뤘다. 잘 다듬은 장대석을 2벌대로 쌓고, 기단 위에 장대석의 섬돌이 보인다. 둥근 기둥을 세우고 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 세 칸이 배치돼 있다. 안채는 안방을 중심으로 아래채 쪽으로도 마루를 꾸민 게 특징이다. 아래채에 연결되는 마루의 바라지창을 열면 독립된 후원이 나오고, 이곳에 연결된 협문의 하나는 사랑채 뒤편과 직접 연결된다. 바깥주인이 하인들에게 보이지 않고 협문을 통해 부인 방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한 '비밀통로'다. 특히 안채는 앞 퇴에 반듯한 주춧돌과 둥근 기둥을 세워 지붕을 높이고 기둥 위에 보아지를 꾸며 화려하지 않지만,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당의 협문을 통하거나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사랑채와 약간 비켜선 축으로 가묘(家廟)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가묘는 통상 북동쪽에 위치하는데, 이 집에선 북서쪽에 있는 게 특이하다. 원래 이 가묘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 부자 댁 왼쪽에 있는 '교동법주집' 소유였으나, 최씨 집안 작은아들이 교동법주집을 물려받고 큰아들이 지금의 최씨고택을 새로 지어 분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집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지붕 마루 끝에 우뚝한 망와.
■8대 최기영이 교리로 이사

최 부자 집안의 파시조(派始祖)는 최진립(1568~1636) 장군이다. 최진립에서 7대 최언경(1743~1804)대까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살다가 8대 최기영(1768~1834)대에 교리로 입향했다. 최진립에서 문파 최준(1884~1970) 선생까지 12대에 걸쳐 만석꾼의 지위를 누렸다.

교리 이전 당시의 일화가 흥미롭다. 이곳엔 경주향교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성스러운 향교 옆으로 민가가 들어오는 데 대해 유림의 반대가 거셌다. 요즘으로 치면 학교정화구역에 호텔이 들어오는 격이었을 터. 그러자 최 부자는 땅을 두 자 정도 덜어 내고 대들보를 석 자 정도 낮춰 향교보다 다섯 자 낮게 집을 짓기로 약조했다. 더욱이 재정이 어렵던 향교 측에 미곡 1000석을 기부함으로써 유림의 동의를 얻어 냈다.

마지막 만석꾼인 문파 최준 선생을 빼고는 최 부자 집을 논할 수 없다. 문파는 뛰어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였다. 문파는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문파는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며,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에게 거액의 자금을 송금하기도 했다. 문파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국내 최대·최고의 곳간채는 지붕 양쪽 옆면에 바람막이 판인 풍판을 달았다.
■해방 후 전 재산 사회 환원

문파는 해방 후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소신으로 모든 재산을 기증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설립했다. 이후 두 대학은 대구대학으로 합병됐으며 대구대학은 다시 청구대와 합병돼 영남대학으로 거듭났다. 현재 최씨고택을 비롯해 교동의 대부분 땅과 가옥은 영남대 재단인 영남학원 소유로 돼 있다.

최 부자 집 후손은 문파의 손자인 최염(86) 씨를 거쳐 최 씨의 손자(16대)까지 내려와 있다.

최씨고택은 영남대학 도서관 직원인 최용부(76) 선생이 12년간 관리와 해설 일을 맡아 왔으나, 2월 말에 퇴임했다. 대신 대학 측은 직원 2명을 파견해 365일 집을 개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관람만 가능할 뿐 숙박 체험은 할 수 없는 게 못내 아쉽다.

중문 옆 패널에 적힌 이 집안의 육연(여섯 가지 수신 지침)과 육훈(여섯 가지 행동 지침)을 다시 한번 암송하고 발길을 돌린다. 부불삼대(富不三代), 권불십년이라 했건만, 최 부자 집이 300년 이상 부와 명예를 이어온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육훈은 아래와 같다. '①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②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③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④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⑥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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