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세상 속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외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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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논설위원

그전부터 궁금했던 <82년생 김지영>을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난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하며 "82년생 김지영을 안아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하고나서였다. 평범한 여성의 대명사 김지영 씨가 태어나면서부터 직장생활을 거쳐 전업주부가 될 때까지 겪어야 했던 남녀차별, 성폭력, 육아 문제가 아프게 와닿으며 미안해졌다. 이 책을 읽은 주변 남자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여자들은 덤덤한 편이라 의외였다. 여자라면 다들 겪는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성과만 내면 모든 걸 용납
평범한 사람도 괴물로 변해

출산율 제고 위해 돈만 쏟아
성 평등 무시한 정책 방향 잘못

미투로 여성 문제 터져 나와
귀 기울일 때 미래 달라져

오늘은 또 누가 미투(#MeToo)와 관련되었다고 나올까.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으며 미투는 화제에 빠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잘 몰랐지만 학교마다 이상한 교사가 한 명씩은 있었고, 학교나 사회에서 성추행을 안 당해 본 여성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는 미투 이야기 뒤에 남자들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담이 이어졌다. 중년 이상 남자들의 학창시절은 영화 '친구'에서처럼 학원폭력물에 가까웠다. 이성관이 확립되기도 전인 어린 학생들 앞에서 왜곡된 성 의식으로 언어 폭력을 휘두르던 교사도 있었다. 지인이 나온 학교는 폭력이 더 심했다. 교사가 3학년을 집단으로 때리면, 3학년은 몰려가서 2학년, 2학년은 다시 1학년, 1학년의 힘센 아이들은 약한 아이를 때렸다고 했다. 폭력의 면죄부는 입시 성적이었다. 서울대만 많이 보내면 우수한 교사와 명문 학교가 되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성적이 실적으로 용어만 달라졌지 그 잘난 실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되었다. 미투의 가해자들, 이들도 처음엔 평범했지만 성과를 내고 나서 무슨 짓을 해도 주변에서 묵인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점점 괴물로 변해 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눈앞의 성과에만 목을 매던 숨 막히던 한국 사회가 미투 운동과 함께 달라지는 것 같아 반갑다.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출산율만 해도 그렇다. 인구 절벽으로 한국은 300년 뒤에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국가 1호가 된다는 경고까지 나온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여성들이 왜 아이를 안 낳는지 이유를 알아내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목표를 높이 세우고 많이 낳을수록 포상금을 많이 안기는 방식으로 돈만 퍼부으니 효과가 날 리 없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합계출산율을 1.5명으로 올리자는 핵심 목표에는 여성 건강과 삶에 대한 고려와 성 평등 관점이 아예 사라졌으니 저출산 대책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라고 권고하고 나섰다. 비록 늦어도 잘못된 길이면 돌아가는 것이 맞다. 3년 전 한국을 방문한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카롤린스카 교수도 "단순히 인구정책만으로는 안 된다. 한국 여성은 사회에서 전문성을 갖고 일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시부모를 모시고 집안일을 해야 하니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모두가 노력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가 변화되고,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면 남자도 살기 좋아진다고도 했다. 실제로 페미니즘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남녀의 기대 수명 차이가 줄어들었다. 목표도 출산율 제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질을 개선해 더 나은 사회에서 다 같이 잘 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요즘 학교에서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막말을 하는 교사는 자취를 감춰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여성 비하적인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며 사용한다고 한다. 지난 1월 초에 올라온 '초·중·고등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해 달라'는 청원에 대해 청와대는 "이미 양성평등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양적·질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다. 2011년 이후 중단된 '초·중·고 인권교육 실태조사'를 연내 재개해 성 평등 교육을 포함한 체계적인 통합인권교육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페미니즘 교육이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까지 포함해서 추진된다니 잘된 일이다.

<82년생…>의 작가는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딸들이 더 크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책을 맺었다. 미투를 계기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만큼 한국 사회는 변할 것이고, 한국의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다.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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