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원의 영화와 삶] 자기 고백이라는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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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1979년 6월 미국의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살해당한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사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친구들은 무려 메드가 에버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볼드윈은 그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를 미국의 역사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30페이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집필 과정을 '스스로도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알지 못하는 여정'이라고 했던 그는 그 여정을 끝내지 않는 것으로 끝냈다. 아니, 열어 두었다고 해야 할까. 그 작업을 라울 펙 감독이 이어받았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볼드윈이 남긴 미완의 에세이 <리멤버 디스 하우스>를 각본 삼아 차별과 폭력의 미국사를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사실 나를 이 영화로 이끈 것은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 '블랙팬서'였다. 가상의 국가 와칸다의 왕위를 두고 대립하는 두 명의 주인공은 마치 마틴 루서 킹과 맬컴 엑스의 현신 같았고, 두 편의 영화를 맞대어 보면 흑인민권운동가들을 암살한 1960년대와 흑인 슈퍼히어로에 환호하는 2010년대가 어떻게 연결될지 가늠될 듯했다.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대답은 꽤 통렬하다. 1965년 케임브리지대학 강연에서 볼드윈은 이렇게 말한다. "전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40년 안에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할렘 주민의 눈으로 볼 때 그 말은, 이 땅에서 400년이나 살았던 우리에게 착하게 굴면 40년 뒤에 대통령을 시켜 주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대통령 자리를 넘보며 할렘에 지금 발을 들인 '그'가 '우리'에겐 40년 뒤를 말한다는 것이다. 피켓 들고 거리로 자꾸 몰려나오지 말고 먼 미래에 희망을 두고 착하게 굴라고. '그렇게 흑인 대통령이 나왔고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도 나왔지만 그래서 뭐?' 볼드윈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일갈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폭력의 미국사 재구성한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할렘 출신의 게이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외침 눈길

우리 사회 향한 용기 있는 고백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뜻해

무엇보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특별함은 볼드윈의 자기 고백적인 문장들을 온전히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취한 데에 있다. 그 고백에 두려움과 고통, 분노가 없을 수 없지만 위엄 있는 어조와 강한 기세가 그것을 기어이 아름답다고 할 경지로 이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은 잊기 힘들다. "당신은 날 보지 않아도 됐지만 난 당신을 봐야 했다. 당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당신을 더 잘 안다." 미국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국을 떠돌며 살았던 할렘 출신의 게이 흑인 작가는 자기 종족의 희생자적 위치에서 놀랄 만한 강점을 찾아내 이렇게 목소리를 냈다.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목소리들은 대개 권력자들의 것이다. 입이 있다고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들은 믿는다. 힘없는 존재들은 목소리를 잃었고 세상은 뒤틀린 채 그럭저럭 굴러가자 우리도 태연한 얼굴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보니 진짜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허상임을 누가 모르는가. 어느 날, 기적처럼, 침묵이 깨어지고 거기에 하나둘 목소리가 더해지자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난 당신이 필요로 하는 깜둥이가 아니다'는 볼드윈의 외침은 아직 시효를 잃지 않았다. 지금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도 그런 목소리들이다.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도 아니고, 친구와 가족에게 털어놓는 고통의 호소도 아닌,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 없던)타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들. 이 고백의 형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음습하고 비밀스러운 과거의 암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볼드윈의 귀띔대로, '우리'는 '저들'을 잘 안다. 그들이 아는 것보다 더.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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