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성문 앞 그 우물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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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소조(沼釣) 형. 오십 년도 넘은 옛날, 중학교 음악 시간에 서양 노래 참 많이 배웠지요. 당시 저로서는 풀 길 없는 의혹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령 포스터의 가곡 '꿈길에서'는 어디를 봐도 분명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노래인데, "벗이여, 꿈 깨어 내게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아리따운 연인과의 이별을 노래한 라이턴의 가곡은 제목이 '나의 벗'이고 가사도 "그리운 내 동무여, 그대 지금 어디뇨"라 했는데 그 고색창연한 감탄형 의문 종지법도 낯설거니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에게 동무나 벗은 여드름이 울퉁불퉁한 철수나 영식이지 봄철 복사꽃같이 예쁜 순이나 영희를 연상할 순 없을 터이니 아무리 음악 선생님이 두들겨 팬들 우리 가창에서 그 달콤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어디 제대로 살아나겠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노래들이 대부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을 거쳐 소개된 것이라, 가사가 당시 어법이나 도덕 기준에 맞추어 번역, 번안되었거나 혹은 전혀 얼토당토않은 내용으로 개작되어 우리 세대에까지 전해졌겠지요. 이제 개화기로부터 백 년도 넘게 세월이 흘렀으니, 우리네 시인들께서도 무슨 소린지도 모를 난해한 시구나 나열하거나 설익고 어줍은 경구(警句)만 강요할 게 아니라 그 노래 가사들을 지금 시대의 멋들어진 우리말로 옮겨 주신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서양 가곡 가사 정서와 동떨어져
슈베르트 '보리수' 고단한 삶 위로
우물은 가장 웅숭깊은 종교 상징


근데 친구들과 한잔하고 가끔 그때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노라면 어색해 보이는 그 옛날 가사들이 어찌 그리도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지 참 묘하더군요. 미성의 소유자인 친구 여조(如照)가 잘 부르는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가 바로 그렇습니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가지는 흔들려서 말하여 주는 듯/그대여 여기 와서 안식을 찾으라." 우물곁 보리수에 고단한 몸을 기댄 겨울 나그네처럼 이제 제 또래들도 세사의 파란에 어지간히 지쳤을 만하지요. 이젠 승리보다 평화가, 전진보다 휴식이 그리워질 땝니다. 그래서 캐나다 이민 간 친구는 이렇게 토로했다지요." 마, 이대로 살다 죽게 내삐리 도라!"고요.

우물은 아마 인류가 찾아낸 가장 웅숭깊은 종교 상징의 하나일 겁니다. 불교설화에서 우물은 천상의 통로였지요. 극락의 우물곁에서 부처님은 저 아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내려다보다가 그중 한 사나이가 거지에게 밥 한 사발 보시했던 일을 기억해 내곤 구원의 거미줄을 내려보냈습니다. 그 녀석이 줄이 끊어질까 겁내 자기 밑에 줄지어 매달린 다른 죄인들을 마구 발로 차다가 그만 거미줄이 끊어져 다시 지옥으로 곤두박질치자 부처님은 슬픔에 잠겨 탄식하셨다지요. "아아, 중생의 우물이여. 그 깊음이여!" 또한 예수님이 이방의 여인에게 마르지 않는 물, 영생의 물에 관한 비유를 들려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의 문을 처음 여신 곳도 바로 사마리아 땅 야곱의 우물곁이 아니었습니까.

김종한(金鍾漢)이란 시인이 있었습니다. 호를 을파소(乙巴素)라 했는데 해방 직전 스물여덟 살 나이로 요절했지요. 정지용의 추천으로 제법 문단의 주목을 끌었지만 일제 말기에 친일문학에 부역하는 바람에 지금은 완전히 매장된 사람입니다. 어떻든 저는 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가 너무 좋습니다.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도 흘러오는데/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는구료."

소조 형. 이제 아련히 떠오르시지요. 중학교 문예반 모임에서, 서울사대 졸업 후 갓 부임하신 박꽃처럼 고운 여선생님께서 읽어 주셨던 바로 그 시입니다. 그 시절 벗, 동무들 구덕산 우물곁에 다시 모여 옛이야기 나누며 슈베르트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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