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딸 아내 엄마가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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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논설위원

잠자리가 불편한 탓일까? 요즘 들어 자고 일어나도 몸은 찌뿌둥하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가슴은 답답하고 게다가 출근해서나 퇴근해서나 멍 때리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만하다. 성범죄와 성추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사회.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검찰을 넘어 문학계를 지나 연극판에서도 낱낱이 들여다보게 되면서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기엔 힘들었으리라.

이미 '괴물'로 불리는 유명 연극연출가는 속속 이어지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선언에 진정한 사죄는 고사하고 '사과 기자회견' 예행연습까지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한 거지!'라는 생각에 한때 배우 지망생인 딸아이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보다 극단으로 보낼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엄마로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다.

성범죄·성추문 꼬리 무는 현실
약자를 지키고 응원하기는커녕
외면한 건 아닌지 참담한 심정

"네 잘못 아니야" 피해자 보듬고
당신과 함께 '위드유' 외칠 때
'침묵의 카르텔' 깨부술 수 있어


대학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모교 출신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한 유명 배우는 제자들을 상습적으로 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루머'라고 맞서다 추가 폭로가 잇따르자 소속사를 통해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어젠 속칭 '지라시'라는 걸 보다가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해 딸아이가 오디션에 참여한 어떤 작품의 연출가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여서, 배우 지망생이어서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아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여자여서 더 아프게 느끼는 걸까? 아니다. 이건 여자 남자 구분 지을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남자들에겐 딸이 있거나 아내가 있거나 적어도 엄마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건 약자를 지켜주고 응원하기는커녕 더 매몰차게 무시하고 외면하고 짓밟기까지 하는 우리 사회의 참담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풍경이며, 우리가 기어이 걷어내야 할 적폐일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 '데이트폭력'의 위험성을 다룬 글을 읽다가 놀란 적이 있다. 미국에서 진행된 미즈 프로젝트에 따르면 법적 의미의 강간을 경험한 여성 중 27%만이 자신을 강간 피해자로 생각했다. 이 피해자들의 42%는 가해자와 다시 성관계를 가졌다. '이미 일어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다는 분석이다. 성폭력 문제 제기는 피해 직후가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의미화 되는 과정 중 일부였던 것이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당사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검찰 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만 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서 검사는 8년, 또 다른 이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 괴물에겐 '관습'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피해자들에겐 오랜 시간 묵혀 온 고통이었다. 안 그래도 피해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데 '2차 피해'까지 확산되는 상황이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대부분 혼자 감당하느라고 힘든 시간을 보낸 그들이다. 우린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도덕적불감증>에서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은 기억과 연대라는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우만식 표현대로라면 '솔리태리(solitary·혼자의)' 대신 '솔리대리티(solidarity·연대)'다. 지금 우리에겐 솔리태리의 't' 대신 솔리대리티의 'd'를 누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하겠다)'가 물결쳐야 한다.

침묵과 방관의 대가는 크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는 나치가 처음 공산주의자를 체포하러 왔을 때 침묵했다. 그 다음에는 유대인, 노동조합원, 가톨릭교도를 잡아갔지만 가만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니묄러를 잡으러 왔다. 그때는 이미 누군가를 옹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서 검사 사건 때도 지적됐지만 그 자리에 모인 이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용기 내서 얘기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으로 치달았을까.

내가 속한 조직에 피해가 될까 봐 침묵했던 여성들도 '정색하지 말걸' 하고 금세 후회하더라도 반복해서 불편함을 사색하고 대응할 근력을 당당하게 키워 나갔으면 한다. 남성들도 알아야 한다. 여성들의 침묵이 동의가 아니라 거절임을. 동의 없는 접촉과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농담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정책,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건 결국 함께 사는 구성원의 몫이다. 앞으로도 '위드유'와 함께하는 미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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