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선] 교육의 네 가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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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모를 일투성이인 것이 요즈음이라지만, 교육 그것의 해결책은 갈수록 모르겠다. 교육만이 살길이라며 민립대학 운동을 하시고, 일본에 온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가셨다던 '순진한 독립운동가' 나의 아버지 정신을 생각하면 두려워지기만 한다. 학생들은 자꾸 줄어든다는데, 웬만한 지식은 인터넷이 가르쳐 준다는데, 갈수록 학원은 성황이라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당연한 인생의 수순으로 학교에 간다.

이광수의 소설에 지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항상 다른 인물을 제압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항상 선한 인물은 손이 하얀, 신데렐라 동화에 나오는 왕자처럼 백색의 살빛을 가지고 있는 마른 남자이다. 그들의 직업은 대체로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유리창이 많은 이층집 예쁜 여학생을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장면도 흔하던 신소설의 장면이다.

학생은 줄고, 학원은 갈수록 성업
학부모와 학생도 다른 곳 쳐다봐
자유와 이상이라는 꿈 되새기며
교육의 '보여 주기' 가치 회복돼야

이러한 교육의 얼굴을 좀 더 생각하면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 번째는 모든 규칙에 익숙해지게 하는 얼굴, 두 번째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얼굴, 세 번째는 명령을 속삭임으로 들리게 하는 얼굴, 네 번째는 자유와 이상을 꿈으로 삼게 하는 얼굴 등이다. 그리고 이 얼굴들의 가면 밑에 숨은 한 가지 가치 의식을 찾아내라면 아마도 '보여 주지 않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학생과 학부모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학생들은 이제 더 이상 신데렐라를 보려 하지 않는다. 하긴 여기에 답은 없겠지만 어른들은 삶이 결코 투기장이 아니라는 것만은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참에 나의 수영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나의 수영 이야기는 상처투성이다. 수영을 중심으로 보자면 지진아인 셈인 나는 젊을 적과 요즘을 합해 여러 번 수영 강습에서 밀려난 끝에 혼자 수영의 여러 동작을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지인에게 장애인수영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수소문한 끝에(좀 우스운 일이긴 하다. 누구든지 잠깐 하면 되는 수영을 비디오, 수영 강습 책들을 사며 독학으로 하다니!) 꿈에도 그리던 수영 동작들을 이럭저럭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전에 밀려났던 수영장으로 가끔 수영을 하러 가는데 그때마다 한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아주 수영을 잘하는 젊은이가 옆 레인으로 온 다음에는 나의 수영이 갑자기 잘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냥 부러워 쳐다만 보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교육은 '보여 주기'가 최고의 방법임을 깨닫는다. 아마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맹모삼천지교'가 바로 이러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요즘은 폭력 교수, 뇌물 교수 등도 심심찮게 세상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교사상을 얼룩지게 하고 있는 이런 스승을 생각하면 결국 그들의 가치는 교육을 점수로만 생각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보여 주기 정신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규칙에 감금된 오늘의 교육 의식은 교육에 과도한 환상을 씌우고 있었으며 그 환상에 익숙하게 되어 학교를 졸업했다가 그 환상에 너무나 반하는 사회에 부닥친다는, 너무나 당연한 신파조의 줄거리 위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얼굴은 '보여 주기'라는 가치 의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육은 모든 환상을 깨부수는 것이다. 결국 보여 준 것만이 남는다. 네 번째 얼굴, 자유와 꿈이라는 진한 이상을 도로 가져와야 한다. 문제의 근원은 어른들이 인생을 잘못 보여 주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학생들은 의외로 순수하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가. 삶을 보여 주고 있는가. 삶은 투기장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가. 또는 분홍빛 꿈만을 보여 주고 있는가. 아니면 교문을 나서는 순간 결코 과외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의 싸늘한 문에 이마를 세게 부닥치게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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