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과 함께하는 도시 항해] 2. 영도 봉래·남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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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아래 스민 서민의 땀, 삶의 흔적들

영도대교 교각 사이로 보이는 용두산공원과 자갈치 시장의 전경. 그 건너편 깡깡이길 입구에 있는 공장, 대풍포 근처 포구에 정박한 선박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부산 남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양 지역은 지금의 부산을 만든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

화려한 이면에는 언제나 그 꽃을 피우게 하는 배후가 있기 마련이다. 멋진 무대 뒤에는 의상과 조명을 위해 땀 흘리는 이가 존재하고, 휘황찬란한 쇼핑 매장 뒤에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 기지가 있는 이치다. 이러한 모습은 지역 생활과 발전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남포동의 불빛은 남항 너머 영도를 기반으로 했기에 가능했다.

부산 일으킨 조선산업 중심지
영도의 역사 따라 간 9㎞ 여정

물류도시 '증언' 거대한 창고들
치열한 삶의 현장 깡깡이마을
향수 자극하는 옛 다방과 맛집

고급 식당과 살롱의 탁자를 수놓았던 아름다운 그릇과 멋진 건물을 일으키는 적벽돌은 수시로 배나 차량으로 남항을 건넜다. 부산의 젖줄인 항만과 수산 산업도 영도의 조선 산업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영도민의 노력이 없었다면, 무슨 수로 화물과 어자원을 나르고 잡았을 것인가.

이성훈 선장은 그 땀의 흔적으로 발길을 향했다. 영도하면 으레 떠올리는 태종대와 감지 해변이 아니라, 서민의 애환이 서린 그곳으로 손을 이끌었다. 총거리 9㎞에 소요시간 3시간.

■'어서 와' 손짓하는 영도

이번 <선장과 함께하는 도시항해>는 도시철도 남포동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한다. 입구에서 영도대교 도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만난다. 이 선장은 그 내용을 꼼꼼히 보더니 세부적으로 틀린 내용을 지적한다.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와 자갈치건어물시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도 일본강점기 건물들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 시장은 그간 재건축 논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앞으로 그 작업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근대유산 보존에 대한 고민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닷가 쪽으로 나가면 남항 건너편으로 우리의 목적지가 보인다. 우리가 선 자리는 유라리광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아픔을 보여주는 동상도 눈길을 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일으켜 몸 세울 수 없는 영도다리/…/1·4 후퇴 때 건너왔는가/사주 관상 택일 금강산 철학관/30년 전통이라는 때 절은 흰색 페인트칠 간판/늙고도 늙었다 빛바랜 그 글씨…' 박남준 시인의 '영도다리 금강산 철학관'의 일부이다. 한때 영도다리 밑에는 많은 점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경은 이렇듯 시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영도대교를 건넌다. 그 끝자락에서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바닷가 길이다. 영도대교 밑을 지나면 주차장이 길게 이어진다. 이곳은 오후 6시가 지나면 포장마차촌으로 바뀐다. 주차안내표지판에 그 시간에 차량을 철수해 달라는 설명이 선명하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 하나둘 포장마차가 들어서고, 뱃사람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며 회포를 나눈다. 이렇게 시작한 포장마차촌이 지금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인기 장소로 부상했다고 이 선장은 설명했다.

그 앞에 '영도웰컴센터'가 보인다. 영도구의 관광지는 물론 부산 전체의 관광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웰컴'이란 센터 이름이 기분을 좋게 한다. 문형태 화가의 작품 <어서 와>를 대할 때 떠올랐던 환대라는 단어의 따뜻함이 다시 느껴진다.

웰컴센터 직원들의 환송을 뒤로하자마자 거대한 창고 건물을 만난다. 보세창고로 쓰였던 곳이다. 잠겨진 철문 틈으로 눈을 대보니 내부는 텅 비어있다. 영도에 이런 창고들이 많다. 이를 새로운 역사적 유산과 도시재생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부산이 근대 물류 중심 도시였다는 것을 이 창고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독일 베를린의 문화공간 '브라우어라이'는 술 저장고가 가진 지역 연계성의 장점을 이용해 탈바꿈시킨 공간이고, 이탈리아 베니스의 아르세날레 건축박람회장은 병기창이 바뀐 건물이다. 

영도대교 교각 사이로 보이는 용두산공원과 자갈치 시장의 전경. 그 건너편 깡깡이길 입구에 있는 공장, 대풍포 근처 포구에 정박한 선박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부산 남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양 지역은 지금의 부산을 만든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
■이중섭이 아르바이트를

머리 위를 지나가는 부산대교 아래서 250m쯤 걸어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해광빌라를 지나면 왼쪽에 항운노조 영도지부 간판이 보인다. 그길로 접어들어 미광마린타워 부지 굽이에 이르면 붉은 벽돌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어느 건물의 담벼락도 아니어서 홀로 서 있다. 무슨 사연이 있을 듯싶다. 소설 <돈 키호테>에 나오는 액자 소설처럼 어떤 얘기와 풍경을 만날지 흥미진진하다. 이를 부산근대역사관이 지난해 7월에 펴낸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를 통해 살펴본다.

1917년 일본경질도기 주식회사가 조선에 진출하여 영도에 조선경질도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식민지 조선의 풍부한 원료와 노동력을 이용하여 수출용 도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수출 호황에 힘입어 조선 최대의 산업도자기 생산기업으로 성장했다. 8·15 광복 이후에는 적산으로 불하되어 1950년 대한도기 주식회사가 세워진다. 이 회사는 한국전쟁 시기에 부산으로 피란 온 화가들을 고용해 화려한 색채와 그림으로 구성된 핸드페인팅 장식용 도자접시를 제작했다. 한국적인 풍속과 풍경을 소재로 한 기념품으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피란 화가들의 생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 이 담장은 과거 부산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도자기 회사의 흔적인 것이다.

한국전쟁 때 그 회사에서 일한 피란화가들의 이름을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에서 다시 찾아본다. 김은호, 변관식, 김환기, 전혁림, 이중섭 등 일반인의 귀에도 익숙한 거장들이 망라돼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화가들이 그린 도자기 그림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그 당시에 미군 병사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박수근 화백의 얘기가 나오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도 떠오른다. 붉은 담장 앞에 서니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오른다.

미광마린타워아파트 부지를 한바퀴 돌아 길 건너 삼진어묵체험역사관을 지나친다. 부산대교 밑에서 왼쪽으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선다. 일제강점시대 유곽들의 자취를 보기 위해서다. 이 선장의 설명이 없으면, 단순한 가옥으로 알고 지나쳤을 모습이다. 식당 '삼형제오리'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측으로 초원복국이 보이는 지점까지 와서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아 대교사거리까지 나간다. 횡단보도 너머에 '패총(조개더미)'이 발견된 곳이란 비석이 서 있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곳에 패총유적지라니 의아하다. 과거 발견된 패총이 도로 건설로 유실됐다는 설명에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맛 전문가도 인정한 돼지국밥

영도경찰서 방향으로 200m거리에 있는 부광약국에서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바닷가가 나온다. 대동대교맨션아파트 앞에 있는 대풍포매축비까지 걷는다. 매축비에는 매립되기 전 1926년까지 그곳이 포구였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여기서부터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이 시작한다. 곳곳에 선박이 정박해있고, 선용품점들도 즐비하다. 여러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몰려 있다. 쇠 냄새, 기름 냄새, 바다 냄새가 묘하게 섞이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특유의 향기를 풍긴다. 낡은 배에서 녹을 떼는 "깡깡깡" 소리로 이곳이 깡깡이마을로 불리게 됐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공감각으로 절감한다.

깡깡이길 곳곳에 점점이 박혀있는 예술품들은 도시재생의 새 유형을 느끼게 한다. 공장들이밀집한 지역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은 주는 장치이다. 거리박물관을 걷다 보면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이란 팻말을 만난다. 그곳을 지나면 남항 너머 원도심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 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깡깡이예술포토존 근처에 있는 양다방에서 다리쉼을 하며 쌍화차 한잔을 시켰다. 옛 모습을 간직한 그 다방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봉래산을 바라보며 걷는 대평로에서 아파트 벽면에 그려진 '우리 모두의 어머니'란 제목의 대형 그라피티를 만난다. 독일 출신 그라피티 벽화작가인 헨드릭 바르키르히가 지난해 그린 작품이다.

남항동주민센터까지 걸어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절영로 너머 제주은행으로 향한다. 이 구간 안에 물회골목이 있다. 이 선장은 전국 물회 양식을 모두 맛볼수 있는 곳이라며 입맛을 다신다. 여기서 봉래산을 향해 걸으면 남항시장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시장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돼있기 때문이다. 시장 안에는 빙장(氷藏)회라는 독특한 음식이 이채롭다. 얼음에 잰 선어를 숙성해 먹는 회이다.

이 근처에는 세 곳의 돼지국밥 식당이 유명하다. 1938년에 문을 연 '소문난 돼지국밥'(051-416-1546)은 가장 오래된 돼지국밥집으로 알려져 있다. 가까이에 있는 제주할매순대국밥(051-416-8410), 재기돼지국밥(051-418-0526)에도 손님들이 붐빈다. 꽤 알려진 어느 맛칼럼리스트가 잇달아 세 식당의 돼지국밥을 먹고는 서울로 떠났다는 일화도 있다. 남항시장에서 영선동우체국 방향에 멍텅구리(051-415-2421)란 맛집이 있다. 2015년 본보에 '생선 한 마리 통째 끓인 매운탕이 서비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집이다. 여기서 영도고가교를 지나 절영로에 접어들면 곧 흰여울문화마을 입구이다.

길잡이·자료제공=이성훈 선장

글·사진=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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