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3. 안동 노송정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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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퇴계의 서재에서 겨울밤이 길어 책장을 넘기다

노송정종택은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건립한 집이다. 정면은 종택의 본채이고, 오른쪽은 강학을 하던 노송정이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지역이다. 이 자부심의 근저에는 퇴계 이황(1501~1570년)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동방의 주자'로 불리는 퇴계의 사상은 너무나 깊고 넓어 범인의 좁은 안목으론 쉽게 가늠하기조차 힘들지만, 주자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학문적 업적은 제쳐 놓고라도 끝없이 관직에서 물러나 위기지학의 학문에 몰두한 그의 삶은 오늘날에 오히려 울림이 크다.

1454년 퇴계의 조부가 지은
진성 이씨 온혜파의 종가

방 두 개마다 마루 하나 둔 구조
안채 2층에 여성 전용장소 독특

퇴계 태어난 '태실'로 더 유명
37세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아

■성리학의 거성이 난 태실

이번 취재는 오롯이 퇴계의 흔적 찾기에 맞춰졌다. 목적지는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종택(경북 민속자료 제60호). 퇴계가 태어난 방이 있다 하여 '퇴계태실(退溪胎室)'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봉화군과 도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북쪽의 용두산에서 발원한 온혜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인근에 노송정은 자리 잡고 있다. 진성 이씨 온혜파의 종가다.

노송정종택은 1454년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세운 건물이다. 550년이 넘은 고택 중의 고택인 셈. 이계양은 진성 이씨 시조 이석의 5세손(퇴계는 7세손)이다. 이계양은 단종을 폐위하려 하던 계유정난 때, 초야에 은거하기로 하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이계양은 당시 봉화군 훈도로 관직에 있었는데, 신라현 고개를 넘어가다 잠시 쉬고 있을 때 허기진 승려 한 분을 구명한 일이 있었다. 스님은 그 보답으로 이계양을 데리고 온혜리로 왔으며 "여기에 터를 잡고 살면 귀한 자손을 둘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귀한 자손이 바로 퇴계가 아니겠는가.

솟을지붕의 출입문에 '聖臨門(성림문)' 현판이 눈에 띈다. 성림문은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성인이 왕림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짓고 썼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맞은편에 빨간색 테두리를 한 '老松亭' 현판이 돌올하다. 한석봉의 친필 글씨이다. 노송정은 ㄱ자형 정자로, 뒷면과 우측면을 판벽과 쌍여닫이 판장문으로 폐쇄하고 전면을 개방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마루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앞쪽으로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툇간을 돌출시켰다. 온돌방 문 위에 '屋漏無愧(옥루무괴)'라는 현판이 보인다. '혼자 구석진 방에 앉아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 정자 대청 양옆면에는 山南洛민(산남낙민), 海東鄒魯(해동추로)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각각 '낙읍은 정이·정호 형제가 살던 곳이고, 민은 주자가 살던 곳이다' '추나라에선 맹자가 태어났고 노나라에선 공자가 태어났다'는 뜻. 즉, 이곳이 한국 성리학의 거성 퇴계가 태어난 곳임을 은유하고 있다.

노송정은 방과 대청 사이에 4분합들문을 달아 개방성을 높였다. 넓은 대청과 방을 개방하면 족히 100명은 앉을 수 있는 강학 공간으로 변신한다. 박점석 안동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자가 호남에선 풍류의 무대이지만 영남에선 학문의 공간임을 보여 주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노송정 기둥마다 주련이 붙어 있다. 퇴계와 넷째 형 온계 사이에 오간 시문이라고 하나, 그 내용을 알 길은 없었다.

■학문의 기초를 세운 집

집안 살림살이의 규모를 말해주는 거대한 장독대
노송정을 한참 훑은 뒤 이 집의 본채로 향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구조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채, 뒤쪽에 정침, 좌우에 양측사를 둔 완전한 ㅁ자 평면을 이룬다. 방 두 개마다 마루 하나를 둔 독특한 구조도 눈에 띈다. 또 사랑채 중문에서부터 마루를 끼고 돌아 큰사랑방 끝까지 넓은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한 점, 안채 2층에 공간을 둬 여성의 은밀한 장소로 활용하게 한 점 등은 일반 고택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사랑채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 작은 편액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龜巖(구암)과 芝澗(지간)이 그것. 구암은 퇴계의 12세손 이홍종의 호이고, 지간은 퇴계의 14세손 이종도의 호이다. 두 개 모두 고종 연간에 5조 판서를 역임한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퇴계 선생이 태어난 '퇴계태실'
이제 이 집의 하이라이트인 태실을 둘러볼 차례. '退溪先生胎室'이라는 멋스러운 글자가 적힌 현판이 위에 붙어 있다. 안채 가운데 부분에서 앞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정사각형의 온돌방이다. 이 바람에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집은 日자 형태가 된다. 3면에 걸쳐 툇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달았다. 이런 돌출형 건물 형태는 전통 한옥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4면에 한지를 바른 여닫이문이 달려 있어 채광이 매우 좋아 보인다. 문을 열어 보니 구석에 고풍스러운 나무 장식품 하나만 달랑 놓여 있을 뿐, 깨끗하게 비어 청정하다.

아득한 옛일을 생각해 보면 태실에선 퇴계의 기운이 느껴진다. 우렁찬 고고성과 철없이 뛰어놀던 모습, 그리고 의젓하게 사서삼경을 암송하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노송정은 퇴계가 허 씨 부인과 신접살림을 시작한 곳이며, 맏아들 준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퇴계는 분가한 37세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희로애락 종부의 삶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벌써 어둠이 내린다. 영광스럽게도 퇴계가 공부한 서재가 오늘밤 묵을 방이다. 미리 군불을 때 놓은 때문인지 아랫목이 뜨끈뜨끈하다. 노송정의 18대 종부 최정숙(71) 여사가 문을 두드린다. 종손 이창건(73) 선생이 서울 출타 중이어서 최 여사에게 미리 인터뷰를 요청해 뒀다. 소반에 먹거리를 들고 들어온다. 호박씨, 방울토마토, 우엉, 박, 연근 등을 말려 조리한 다식이다. 단호박식혜도 곁들여졌다. 일체의 조미를 하지 않은 건강식이다. 종부의 손맛이 예사롭지 않다.

대종가의 종부로 40여 년을 살아온 삶이 힘겹지는 않았을까?
노송정의 18대 종부 최정숙 여사가 집안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최 여사는 "운명이거니 하고 버텨 왔는데, 이젠 어디 가나 종부라고 대접 받고 삽니다"라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회한보다 자부심이 더 크게 느껴진다.

처음 시집 왔을 당시 집안의 경제력은 형편없었지만, 봉제사접빈객(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1년에 제사만 13번이었고, 손님은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묵묵히 견뎌냈다.

종부답게 최 여사의 음식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 9월 농촌진흥청이 주관하는 '한국 전통 종가 내림음식 프로모션'에 초대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음식 경연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 12개 '종가음식'에 뽑힌 것이다.
종부 최정숙 여사가 차려 준 아침 밥상.
다음 날 아침식사가 제공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숙박객들에겐 아침을 대접한다는 게 최 여사의 소신이다. 접빈객이 몸에 밴 때문이다. 땅콩이 들어간 쌀밥에 간고등어구이, 청국장, 장아찌류, 호박전 등 일반 가정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한 게 옛날 어머니 손맛처럼 웅숭깊다. 후식으로 안동식혜가 나온다. 맵싸한 맛이 입안을 깔끔하게 헹궈 준다.

집을 나설 때 종부는 대문간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며 슬쩍 한마디를 건낸다. "저희 집 얘기가 기사화하면 신문 한 부 보내 주세요."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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