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한 글자가 천금이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진원 교열부장

오래전 퇴직한 회사 선배들은 술병을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르며 "일적 천금"이라는 농을 하곤 했다. '一滴 千金', 그러니까 한 방울이 천금같이 귀하다는 얘기였다. 저 말을 교열 업무에 맞게 바꿔 보자면 '일자(一字) 천금'쯤 될 터. 글자 하나를 천금같이 여기는 마음이라야 글을 제대로 깁고 바룰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퇴고·교정뿐만 아니라 교열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글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멋들어진 문장은 때로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눈 오는 편백 숲속에 서면 나는 한없이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일자 천금' 정신으로 교열하자면, 우선 '숲속에'를 '숲에'로 바꿔야 한다. 편백 숲에 관한 이야기이니 굳이 '속'이라고까지 안 해도 되는 것. 화자를 밝히는 '나는' 역시 빼도 된다. '편안한 감정-느낀다'도 중복 표현. 해서, 가다듬으면 이렇게 된다.

'눈 오는 편백 숲에 서면 한없이 편안하다.'

깔끔한 데다, 26자에서 16자로 글자 수까지 확 줄었다. 저렇게 아낀 지면만큼 독자에게는 다른 정보를 더 제공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교열이 주는 짜릿한 맛이다. 손맛을 좀 더 보자.

'올해 복지 예산은 115조 7천억 원에 달한다. 9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수치다.'

이 기사 둘째 문장은 '9년 만에 배로 늘어났다'면 충분.

우리말에 들어 있는 이런 중언부언들을 따라가다 보면, 버터 냄새가 솔솔 나기도 한다. 일찍부터 배운 영어가 알게 모르게 우리 말글살이에 악영향을 끼친 것. 아래 문장을 번역해 보자.

"My husband and I split up last year."

직역하면 "나의 남편과 나는 작년에 갈라섰어"인데, 여기서 멈추면 고급스러운 우리말 화자가 되기는 어렵다. "남편과 나는 작년에 갈라섰어" 정도는 돼야 중급. "남편과는 작년에 갈라섰어"라야 고급스럽다. 다시 돌아가자.

*전 세계 500만 명의 사람들이→전 세계 500만 명이

*이들 기관들은→이들 기관은, 이 기관들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베일에 가려 있다

알고 보면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고, 짜릿하다. 이런 손맛, 알고 나면 정말 남 주기 아까울 지경이랄까.

jinwon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