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한국판 안네의 일기
"죽음 같은 고요함이 곳곳에 뒤덮여 있어. …날개가 부러진 채 캄캄한 밤에 혼자 둥지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는 새 같은 심정이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비밀공간에 숨어 사는 13세 유대인 소녀의 마음은 나이답지 않게 무거운 회색빛이다.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가 절정을 치닫는 1942~1944년 2년여 동안 가족들과 은신했던 일상을 일기로 낱낱이 기록했다. '안네의 일기'다. 누군가의 밀고로 가족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뒤 뿔뿔이 흩어졌고, 안네는 끝내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강제수용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안네의 일기'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안네의 오리지널 일기, 나중에 안네가 다시 고치고 정서(正書)한 편집본,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아버지가 딸의 소망을 이뤄 주려고 책으로 펴낸 출판본이 그것이다. 출판본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아버지가 걸러 낸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극우 보수주의자,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폄훼는 무척 질겼다. 안네가 실존하지 않았다, 일기는 허구다, 부친이 날조했다는 등의 딴지가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끊이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감정으로 진위의 의문이 해소되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재됐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4년 전까지도 일본 각지의 도서관에서 '안네의 일기'와 홀로코스트 관련 책자들이 대량으로 찢기는 야만적인 훼손 사태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대구의 한 여학생이 11개월 동안 쓴 일기가 최근에 공개돼 '안네의 일기'를 떠올리게 한다. "군인아저씨들은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간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불안하다…." 군가를 부르며 군인을 환송한 일, 일장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외친 일, 나라 없이 전쟁에 내몰리는 식민지의 이중성에 대한 혼란까지 15세 소녀의 모습은 '안네의 일기'와 흡사하다. 당시 일본인 교사가 매일 학생들의 일기 내용까지 검열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일제의 세뇌교육과 행사 동원에 짓눌린 학생들의 정신적인 황폐가 드러났음을 일기는 실증한다. 일본의 한 대학교수가 우리나라 헌책방에서 찾아냈다는 이 여학생일기 역시 일본은 부정하고 싶을까. 인류애의 보편성을 외면한 채 편견과 증오를 만드는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소박한 일기들이 일러주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