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한국 항만정책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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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평택대 국제물류학과 교수

식인종(cannibal)이라는 단어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 카니발리스(Canibalis) 사람들이 식인(食人) 풍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데서 비롯된 말이다. 콜럼버스가 1493년 이 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단다.

카니발에서 파생된 단어로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과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주로 직역하여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카니발리제이션은 비유적으로 '자기시장 잠식'을 뜻한다. 자기시장 잠식은 '제 살 깎아 먹기'로, 한 기업에서 새로 출시한 상품으로 인해 해당 기업에서 이미 팔고 있던 다른 상품의 판매량이 감소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카니발리즘은 같이 망하는 결과를 낳는 부정적 현상을 가리키고, 카니발리제이션은 '파괴적 혁신'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1국2중심항 육성' 정책 실패
제 살 깎아 먹기 부작용 딛고
부산항 2000만 TEU 경사

4차산업혁명 기술·가치 도입
고품질 환적항 변신만이 살길
BPA, 항만기업으로 전환을

부산항의 2000만 TEU 시대 도래를 보면서 이들 단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부산항 등 한국 항만에 대한 정부의 항만정책이 이들 단어의 의미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부산항이 컨테이너 2000만 TEU를 달성한 것은 개항 이후 최대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건설비가 없어 세계은행의 차관을 받아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자성대부두를 건설한 지 40년 만에 달성한 쾌거이다. 또한 지난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한진해운 파산 사태의 여파를 극복했다는 의미도 있다.

부산항 2000만 TEU 시대에 이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산항 2000만 TEU 달성이 혹독한 '카니발리즘의 시대'를 극복하고 어렵게 개막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영국의 세계적 해운항만 전문지인 'CI(Containerisation International)'는 1995년에 '한국 항만의 수수께끼'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이 기사가 당시 관심을 끈 것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1국 2중심항 동시 육성책이 1국 1중심항의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모순된 정책"이라고 비난한 데 있다.

당시 정부는 이 기사에 대해 "한국의 실정도 모르고 쓴 작문"이라고 폄하했으나, 23년이 지난 지금 이 기사의 지적은 사실로 드러났다. 1984년 이후 정부가 추진해 온 부산-광양항 양항정책(two-port policy)은 수많은 카니발리즘적 대책으로 채워졌다. 물동량 전망에 대해 당시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광양항이 2011년에 900만 TEU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것으로 전망했다가 다시 수정하는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양항정책은 부산항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카니발리즘으로 작용했고, 최근까지도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정된 항만 예산을 '나눠 먹기' 하는 바람에 시급한 항만 개발에 차질이 생긴 것이나, 광양항을 기항하면 부산항의 항만시설사용료도 면제해 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부산항 감만부두(4선석)와 광양항 1단계(4선석)를 '1+1 끼워팔기'를 통해 4개 운영사나 탄생시킨 것은 운영사 난립이라는 현재 부산항의 고질적 문제점을 낳은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시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판명 났고, 수수께끼 같은 한국 항만정책은 결국 파괴적 카니발리즘으로 채워진 것이다.

부산항이 '카니발리즘의 시대'를 끝내고 2000만 TEU 시대를 열었지만, 지금부터는 '카니발리제이션의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산항이 환적항으로 변화하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계 제1위의 환적항만인 싱가포르항의 사례를 보자면 인근의 탄종펠레파스항, 포트켈랑 등에 빼앗긴 화물이 최근 다시 회귀하고 있는 이유가 싱가포르항의 탁월한 서비스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저가 상품(하역서비스)을 제공함으로써 환적화물을 유치해 온 부산항도 이제는 고품질의 상품을 제공해야 환적항으로 생존할 수 있다.

또한 조직적으로는 부산항만공사(BPA)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자치항만공사(port authority)에서 탈피하여, 국내외적 항만투자와 운영을 하는 항만기업(port corporation)으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기술과 비즈니스모델, 가치창출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부산항이 카니발리즘의 시대를 극복하고 2000만 TEU 시대를 개막한 것처럼 앞으로는 카니발리제이션의 시대를 선도하는 역할로 재탄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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