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처얼썩, 처얼썩, 우르릉 척, 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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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새해 아침이다. 사실 연말연시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 위에 '각주구검'처럼 새겨 놓은 날짜에 불과하다. 하지만 덕분에 흐르는 물에만 처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흘러온 세월을 돌이켜보고, 또 흘러갈 물줄기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왕국이 주권재민의 공화국으로 재편되는 세계적인 대변혁이 시작된 것이 100년 전이다. 이런 세계사적 흐름에 힘입어 우리는 이듬해 1919년 삼일운동 이후 대한민국 법통의 출발점인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가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현실화된 것이 또한 이 무렵이며, 이후 20년 내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공화국 초기에 파시즘에 휘말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보다 더 광범위한 국제지형의 변화를 낳았다.

100년 전 대한민국 법통 출발
70년 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
65년 전 휴전, 31년 전 6월 항쟁
숨 가쁜 역사 불과 1세기 전 일

2018년도 새로운 변화의 파고
두려움 없이 주도적으로 맞아야

80년 전, 서울에 처음으로 가격표가 붙은 상품이 출시됐으며,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끝에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 이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 70년 전이다.

세계 냉전의 시발점이었던 6·25 동족상잔이 멈춘 게 65년 전이며, 정확히 50년 전 1월 김신조 북한 무장 간첩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결국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대통령 박정희는 시해되었고 18년 독재는 종지부를 찍었다.

31년 전에는, 6·10 민주항쟁의 웃지 못할 결과로 국민들이 직선제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해 여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비로소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인 IMF 시대를 맞아 온 국민이 나라를 살리겠다고 금반지를 모았던 것이 불과 20년 전이었다. 이를 기적적으로 극복하고 이후 미국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야기된 세계적인 경제위기도 그 나름대로 견뎌 낸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

'100세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금 돌이켜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가 불과 지난 100년 동안 일어난 일들로, 주위에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살아 있는 증인도 적지 않다.

30년 전 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6월 항쟁에 대한 영화가 하필 연말에 개봉했다. 솔직히 생각만큼 격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바로 내가 직접 경험한, 내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놓은 그 이야기를 혼자 담담히 감상하는 일은, 눈물보다는 가슴 저린 다짐에 가까웠다.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야만의 시대가, 이 사회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 힘입어 하나둘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고 한다. 불과 1년 전을 돌이켜보면 2017년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지 쉽게 실감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2018년은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잘못돼 왔던 것인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 변화는 무엇을 위한 변화이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리학에 '엔트로피(entropy)'라는 것이 있다. '무질서도(無秩序度)'라는 말로 굳이 번역되기도 하지만, 수학적으로는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로 정의된다. '돌이킬 수 있는' 변화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엔트로피가 커지는 경우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의미하고, 이를 시간의 '방향'이라고 한다. 시간을 절대로 되돌릴 수 없듯이,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불가역적'이다. '불가역적'이라는 것은 우긴다고, 약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은 그 자체로 보다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궁극적 자유를 지향한다.

'처얼썩, 처얼썩 우르릉 척 쏴아./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기존의 견고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의 포효. 110년 전, 아직 친일파가 되기 전,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구절이다.

새로운 시대는 분명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거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러움으로 불가역적인 진정한 변화들을 이룩해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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