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 송소고택
처마에 걸린 겨울 햇살, 대청마루에 스민 한적함이여
고택은 단지 오래된 집이란 의미 그 이상을 내포한다. 수백 년 한자리를 꿋꿋이 지켜 온 고택은 한국 전통가옥의 원형질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알이 품고 있다. 건축학적·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충분한 게 고택이다. 근자에는 숙박시설로
조선 후기 상류층 주택의 전형
전국 3대 '99칸 고택' 중 하나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 지정
뜨끈뜨끈한 군불 사랑채 하룻밤
어릴 적 고향집 겨울밤 떠올라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있는 송소(松韶)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다. 조선 시대에 사가(私家)가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위용을 자랑한다. 보은의 선병국가옥, 강릉 선교장과 더불어 전국 3대 '99칸 고택'으로 꼽힌다. 조선 영조 때 만석꾼이었던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으로 옮기면서 지었다고 한다.
■집안 내력
송소고택을 찾은 날은 최강 한파가 몰려온 날이었다. 청송의 다른 여행지 취재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날이 어둑해져서야 고택에 도착했다. 하필 평일인 데다 비수기여서 넓은 마당은 인적이 뚝 끊기고 어둠과 적막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가운 북풍이 귓불을 베어 낼 듯 매서웠다. 캄캄한 마당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주인장 심재오(62)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읍내 상가(喪家)에 갔다 오는 길인데, 3분 이내에 도착한다는 전갈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심 선생이 곧 도착했다. 곧장 큰 사랑채 공부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여는 순간 온기가 훅 몰려들어 추위가 단박에 달아났다. 숙박을 예약했더니 군불을 잔뜩 때 놓은 모양이다. 두어 평 자그마한 방이지만, 벽에는 대나무와 부채 그림의 액자가 마주 보며 걸려 있고 LED 등은 한지 덮개로 장식돼 운치가 그만이었다. 바닥은 정성껏 옻칠해 반들반들 윤이 나고 아랫목은 시커멓게 변색해 있었다. 어릴 적 고향 집의 겨울밤 풍경이 스쳐 갔다.
"뭐 취재할 게 있다고 이 먼 길을 오셨어요?"
송소고택 주인장 심재오·최윤희 씨 부부가 큰 사랑채 대청에 앉아 자세를 취했다. |
송소고택 99칸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
솟을대문에 붙어 있는 松韶古莊(송소고장) 현판. |
송소고택은 건물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전통적 예와 멋을 잘 구현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헛담'과 '구멍담'이 대표적인 예.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눈앞을 막아서는 담이 있다. 'ㄱ자'를 아래위로 뒤집어 놓은 형태의 헛담이다. 집 밖에서 보았을 때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안채 움직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려는 배려의 소산이다. 헛담을 기준으로 여인네들은 오른쪽으로, 남정네들은 왼쪽으로 돌아 각각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가게 되므로 남녀유별의 '내외담' 기능도 했다.
'구멍담'에는 안채 쪽에서 사랑채를 볼 수 있는 구멍이 3개 나 있다. |
사랑채 쪽에서 보면 6개의 구멍이 나 있지만, 안채를 볼 순 없다. |
굴뚝이 어른 키보다 낮게 설치된 것도 이채롭다. 이것은 여름에는 낮게 깔린 연기로 모기를 쫓는 기능을 하지만, 높게 연기를 날려 보내지 않음으로써 배고픈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려는 양반가의 겸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주목할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문턱이 넓은 U자형이라는 점. 이는 치마를 입은 여인네들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 않고도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큰 사랑채 대청에는 우송서옥(又松書屋)이라는 당호 액자가 걸려 있다. '우송이라는 사람이 책을 읽는 집'이란 뜻. 우리나라 근대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서예가인 석재 서병오 선생의 글씨다.
이처럼 송소고택에는 문화의 향기가 곳곳에 서려 있다. 요즘 뒷마당과 후원에서 해마다 8차례의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심재오 선생은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한마디 했다. "사명감 하나로 집을 지키고 있지만, 매달 고정비만 800만 원이 들어가는 등 유지·보수에 어려움이 큽니다. 한때 매달 80만 원 나오던 정부의 고택 지원금이 그나마 올해부터는 없어져 버렸어요.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 대통령 바뀔 때마다 돌변하니 안타깝습니다."
묵묵히 오랜 세월을 건너온 고택은 희로애락의 숱한 비밀을 건네 왔을 터이지만, 눈멀고 귀먹은 여행객에겐 마이동풍이나 아니었는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