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신춘문예-평론] '남한산성'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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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1. 얼어붙은 삶과 얼지 않는 말(言)

사내의 차갑게 언 입술 사이로 눈보라처럼 희뿌연 김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늙은 뱃사공에게 묻는다. 어제 주상의 길을 안내해놓고 내일은 청병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조선인의 도리가 맞느냐고. 사내에게 안전한 얼음길을 안내하던 뱃사공은 '도리' 대신 '좁쌀 한 줌'을 말한다. 그것이 있고서야 어린 손녀를 먹여 겨울을 날 수 있다. 사내는 뱃사공이 임금을 팔 것이 두려워 칼을 뽑는다. 그에게 백성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나 임금과 백성의 생명은 등가일 수 없다. 임금이 더 중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다. 도리가 없고서는 삶도 있을 수 없다. 명분은 존재에 앞선다. 그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버린 세상에서 '도리의 길'을 걷고자 한다. 그래야 세상이 다시 녹아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사내는 얼어붙은 입술이 공포로 딱딱 부딪히는 걸 간신히 견디며 겨울보다 더 차가운 창검 아래를 지나간다. 겁을 주기 위해 청병이 쏜 화살을 밟아가며 그는 '삶의 길'을 걷고자 한다. 적장 용골대는 그런 길이 쉽지 않음을 일깨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길일지도 모른다. 사내가 들은 교섭조건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죽기는 어려우나 살기도 어렵다. 그 삶이라는 것이 떳떳한 것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삶의 길을 택한다. 삶이 있고서야 비로소 떳떳한 도리도 가능하다고 그는 믿는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고뇌로 시작한다. 영화의 끝도 그렇다. 이 영화는 내내 동일한 상황, 동일한 공간, 동일한 책임을 진 두 사람의 다른 선택과, 그 선택이 추구하는 '생존'과 '명분'이라는 것에 대해 내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밖에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항전하자는 김상헌도 그러자는 말밖에 할 게 없고, 청과 화친을 하여 일단 사지에서 벗어나자는 최명길도 그러자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싸우고 싶어 하는 쪽은 싸울 능력이 없고, 화해를 원하는 쪽은 교섭의 무기를 가지지 못했다.

2. 선택하므로 존재한다

조선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얼지 않는 것은 그들의 숱한 말밖에 없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임금은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기우뚱하고, 대신들은 비겁하게 관망한 채 목청만 높인다. 청병은 채찍으로 허리를 꽉 조이듯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겁먹은 근왕군은 오지 않는다.

살고자 하면 산성을 나가야 하는데, 출성의 방식이 문제다. 무릎 꿇고 엉금엉금 기어나가 목숨을 구걸할 것인가, 삼남의 근왕군과 안팎에서 싸워 '오랑캐'를 물리치고 당당히 걸어 나갈 것인가.

선택은 두 개밖에 없는데, 둘 모두 불가하다. 앞의 것은 하기가 싫고, 뒤의 것은 능력이 안 된다. 하고 싶은 것은 할 수가 없고, 가능한 것은 하고 싶지가 않다. 남한산성의 인물들은 애초에 택일이 불가능한 선택지를 받고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의 무능한 정치를 일차적으로 다루되,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깊숙이 들어간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항상 무언가를 택해야 하지만, 혹은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기도 해야 하지만, 선택지의 양극에 놓인 문항은 삶과 양립하기 힘든 것인 경우가 많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무수한 철학적 논쟁은 한없이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상당한 난제다. 그러나 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선택할 자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도 하나의 결론을 선택한다. 선택의 능력 자체가 유보된 상황에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택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선택은 철학적 난제에 앞서 본능의 영역이다.

우리는 제한된 정보, 제한된 능력, 제한된 미래라는 아주 협소한 선택지 안에서 계속해서 택일을 하며 살아간다. 즉 택함으로써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음을 믿음으로써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 역시 존재의 양태를 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굵은 줄기는 '선택'이다. 선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던지는 주사위이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면서도 그런 걸 시도할 만한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혹은 바로 그래서 선택을 평가하고 항상 과거를 돌아본다. 빚어진 일을 놓고 지난날로 소급하여 회한하고 탄식하는 것밖에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있는가. 선택할 자유는 제한적으로나마 있되 선택할 능력은 없는 우리 앞에 거대한 문항지가 놓일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3. 역관 정명수와 영의정 김류의 선택

청병은 노비 출신 조선인 정명수를 길잡이로 삼아 남진했다. 정명수는 "너희 조선인은 어찌 이리도 아둔한가!"라고 힐난하는 용골대에게 정색한다. 자신은 조선인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조선인이 아니고자 했다. 그가 마침 만난 대상이 청나라였기에 청을 섬기게 되었을 뿐, 그는 조선인만 아니면 어떤 나라든 택했을 것이다.

정명수의 선택에는 분노가 있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비로 일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명수가 그런 신분을 택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제된 이 큰 판에서 삶이라는 배당금을 잃고서 분노했다. 그래서 다시 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갈구했다. 청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는 기회를 잡았다.

좁쌀 한 줌을 주는 쪽이라면 임금이든 용골대든 길을 안내한다는 늙고 굶주린 뱃사공과 정명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 모두 생존이라는 가치를 가장 높이 세웠고, 그에 합당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생존의 방식이 너무나 단순하고 솔직해서 노인은 김상헌의 칼에 베였고, 정명수는 영의정 김류의 말에 베였다. 김류는 "정 대인도 같은 조선사람인데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며 질책한다.

용골대 옆에 바싹 붙어서 조선의 대신을 겁박하고 조선의 임금을 비웃는 정명수는 매국노의 익숙한 이미지를 가졌다. 그러나 매국노가 되려면 우선 그가 배신하고자 하는 나라의 사람이어야 한다. 정명수는 이미 조선인이 아니다. 조선인이 아닌 자를 매국노라고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조선인이 아니므로 매국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조선의 입장에서 정명수를 바라보는 쪽은 그를 매국노라고 단정 짓는다. 이런 태도의 이면에는 모든 선택이 존중받는 것은 아니며, 선택도 명분과 도리에 합당해야 한다는 도덕주의가 깔려 있다.

정명수의 선택 자체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가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명수의 선택을 바라보는 두 갈래의 시선은 곧 '남한산성' 속에서 빚어지는 두 선택의 갈림길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선택이라는 것이 꼭 두 개만 있는 건 아니다. 엉뚱하게도 제3의 길을 걷는 쪽도 있다. 난감한 것은, 이 세 번째 길을 걷는 자들이 가진 현실권력의 비중이 막대하고, 그자들의 수도 가장 많다는 데 있다. 김류가 그 대표다.

영의정 김류는 극한의 상황에서 임금을 보필하고 중신을 통솔하며 국난을 해쳐나갈 막중한 책무를 띤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청병이 쳐들어올 때도, 쳐들어온 후에도, 남한산성에 갇힌 후에도, 임금이 터벅거리며 삼전도로 끌려가다시피 할 때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중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을 그는 택했다. 그럼으로써 김류는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

김상헌은 "삶과 죽음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하지만, 김류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삶도 아니고 죽음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단순한 자기보존을 사랑한다. 김류는 지금껏 살아온 상태 그대로의 타성을 이어가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그가 생존해 있는 방식은 인간의 삶이라기보다는 타성과 관성이라는 물리적 법칙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고뇌하고 선택하고 회한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역관 정명수의 선택이 도덕적으로 옳든 그르든 그의 택일에는 분노라는 인간적 감정이 놓여 있다. 그래서 정명수는 적어도 인간이다. 그러나 김류는 그렇지 않다.

김류가 내내 강조하는 것은 위엄과 체통이다. 그는 종친과 사대부의 옷가지를 추위에 떠는 군병들에게 나눠주자는 김상헌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화려한 옷가지가 없으면 왕실의 위엄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다. "우리 가마니를 빼앗아 말을 먹이고, 그 말을 잡아 우리를 먹이니 감사하다."며 말고기 한 점 먹어보라는 백성의 입을 찢으려 한 것이 김류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체찰사의 체통을 지키고자 했다. 왕실은 위엄이 '있었고', 체찰사는 체통이 '있었다'. 그들의 무능과 비겁이 청병을 불러들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협소한 남한산성에 갇힌 후로 그들은 너무나 왜소하고 남루해져 의복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럼에도 김류는 '있었던' 위엄과 체통의 관성을 의복을 통해 이어가고자 한다.

김류의 저런 행태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정명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단 유보하자. 김류에게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선택에 대한 평가일 수 없다. 그는 선택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대신, 김류가 아무것도 택하지 않고 물리적 움직임으로서만 펄떡거리며 존재하는 그 양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의정인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영의정이기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현 상태에 도전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등장하면 위엄과 체통을 입에 담으며 상대를 꺾는다. 그 상대가 임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칸이 오자 김류는 임금이 알아서 결단하라며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김류가 살아가는 방식은 왠지 낯설지 않다. 오늘날의 풍경과 무척 겹쳐지기에 친숙하기까지 하다. 김류 이전에도, 김류 이후에도 수도 없이 반복돼 왔기에 마치 하나의 매뉴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이 오래됐지만 늘 신선한 매뉴얼이 절망적이다. 지금 보는 것이 저 때도 그랬다면, 저 때 이후로 변한 게 없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훗날에도 매뉴얼로서 기능하리란 절망을 품을 만하니까.

4. 서날쇠와 인조의 경우

인조는 청병이 밀고 들어오자 무턱대고 남산산성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피난처인 강화도로의 길은 막혀버렸다. 난리가 나면 임금부터 몽진을 떠나는 역사는 지루하리만치 반복돼 왔고, 인조는 선례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여기까지다. 남한산성에 틀어박힌 인조는 더 이상 아무런 선택도 못 하고 우왕좌왕한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김류가 차라리 충신이다. 말로써 산성 내에서 또 다른 전투를 벌이는 김상헌과 최명길은 그에게 자꾸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골치 아프기만 한 존재다. 인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진 말라"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하명 뿐이다.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할 땐 그의 말이 옳다 싶다가도, 김상헌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목청을 높일 땐 또 그 말도 옳은 듯도 싶다. 주전과 주화 속에서 하나를 택하지 못하는 인조는 조변석개의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한다. 그는 아침에는 싸우고 싶어 하고, 저녁에는 살고 싶어 한다. 초라한 수라상을 받을 때는 분이 치밀어 싸우고 싶다가도 배를 채우고 나서 최명길을 맞으면 그만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 "전쟁을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은 지는 것이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처럼 그는 패배의 형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패배가 백성과 군병의 패배만이 아니라 임금 자신의 패배가 될까 두려워 머뭇거린다. 무릎을 꿇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세자가 볼모로 끌려가는 것인가, 자신이 폐위되는 것인가, 심지어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는 패배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패배 너머의 개인적 재앙이 두려웠다. 자꾸 머뭇거리기만 하는 건 당연하다. 패배 그 후의 일은 불가지의 세계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칸의 영역이니까. 나라를 이미 도탄에 빠트린 인조는 더 이상 나라와 백성을 걱정해서 망설이는 게 아니었다. 조선은 더 잃을 것도 없었고, 백성은 전란 중에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걱정을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은 김류도, 김상헌도, 최명길도 아니다. 오로지 칸이다. 인조의 고민은 오직 칸의 자비로운 처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인조에게 있어 그런 칸은 신적인 존재로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칸의 도착이 확실시되자 그간 숨겨왔던 본심을 다급하게 외친다. "살고자 한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인조도 그렇고 김류도 그렇다. 심지어 주전파인 김상헌도 싸움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살고자 한다. 그런 점은 대장장이 서날쇠도 다르지 않다.

정묘년의 난리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서날쇠의 운명은 인조의 등장으로 엉키게 된다. 말수가 적은 날쇠는 말의 전장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단지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은 가장 소박하면서도 원초적인 바람이다. 그러나 인조가 나타나자 그 작은 것조차 어렵게 됐다. 어가 행렬은 날쇠의 터전을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꿔놓는다. 이제 날쇠에게도 선택지가 강제로 주어진다. 살기 위해 그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얼어 죽고 싶지 않은 날쇠는 김상헌에게 가마니를 달라고 한다. 청병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휘어진 총신과 비뚤어진 가늠자를 고치겠다고 한다. 정예군도 아니면서 임금의 명을 도원수에게 전달하겠다고 한다.저런 선택들은 호란 이전의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대장장이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반전된 상황은 날쇠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그는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남한산성'의 모든 인물들과 동일하지만, 그 선택의 양상이 달랐다. 정명수처럼 국적을 바꾸는 대신 다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김류가 걷는 엉뚱한 길을 버리고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한다. 인조처럼 갈팡질팡하지 않고 매 순간 최적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집중한다.

날쇠의 선택은 늘 꺾인다. 가마니는 도로 빼앗기고, 고쳐놓은 총은 체찰사의 고집과 무능 탓에 힘을 잃는다. 아군이라고 믿었던 근왕군은 청병보다 날쇠를 죽이는 데 더 적극적이다. 날쇠는 굳이 자신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도원수에게 어명을 전하는 임무에 자원한다. 그러나 근왕군은 임금과 용골대 사이에서 관망하며 한 발 뺀다. 그들은 날쇠의 신분을 문제 삼으며 전달받은 어명을 부정할 궁리만 해댄다.

날쇠의 선택이 늘 좌절되는 것은 그가 계속 무언가를 택하기 때문이다. 인조가 아무런 선택도 않은 채 좌절하여 웅크리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날쇠든 인조든 궁극적인 목표는 삶에 있다. 그러나 그 목표 앞에서 둘이 보이는 행동은 그 신분의 간극만큼이나 너무나 크다. 인조는 전쟁을 치를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도 군마를 위해 민가의 지붕을 뜯어 말을 먹인다. 엄동설한에 집을 잃은 백성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과 같다.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은 후에 또다시 죽을 것을 명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명분을 좇다 청병을 불러들였고, 싸워 이기지도 못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위해 전투를 명했으며, 끝내 이기적인 이유로 굴욕적인 항복을 택한다. 인조는 살고 싶어 하면서도 단 한순간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 반면 날쇠는 살고 싶어 했기에 매 순간을 제대로 살아냈다. 그는 거의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삶을 타인이 아닌 자신이 직접 책임져야 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임금이 누리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희생해줄 누군가가 날쇠에게는 없다.

5. 두 사람의 기다림과 선택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실존적 성질을 '기다림'으로 상징하고, 끝없고 소득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극 중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희비극적 인물들로 형상화된다. 둘은 고도가 무엇인지(혹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소년(boy)은 막의 끝마다 등장하여 고도가 올 수 없다는 전언만 남긴 채 사라진다.

이 우스꽝스럽되 진중한 이야기가 별다른 사건 없이도 막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 덕분이다. 두 사람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릴 것을 택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선택의 자장권 안에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을 끌어가는 힘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각기 다른 선택이다. 똑같은 상황에 놓인 둘은 평화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하지만, 그것을 위한 선택은 다르다. 주지하다시피 김상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대의명분을 지키자며 일갈하고, 최명길은 더 큰 피해보다는 작은 손실이 차라리 나으니 청나라에 굴복하자고 설득한다.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선택에 대해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되레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서 잠자코 바라보기만 한다. 둘은 마치 링 위에 오른 한 쌍의 복서들처럼 주고받고 치고받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먹이 아니라 말(言)로써 싸운다는 점뿐이다.

김상헌은 싸우자고 하고, 최명길은 화친하자고 한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싸우자는 말은 영의정 김류를 위시한 다른 중신들도 입을 모은 적이 있다. 화친하자는 말 또한 김류를 포함해서 모두 입 밖에 꺼냈다.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말이라는 것이 '선택한 말'인가, '선택된 말'인가 하는 점이다. 김류 등의 말은 시류와 대세를 살핀 후 쏟아내는, 즉 대세에 의해 선택된 말이라는 점에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칸이 왔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자 그간 임금 앞에서 쏟아졌던 무수한 말 중에서 무엇이 진짜 말인지가 분명해진다. 싸우자고 했다가 화친하자고 했다가 다시 싸우자고 하던 김류 등의 말은 겁에 질려 순식간에 흩어진다. 가장 시끄럽게 떠들던 김류는 인조에게 결정의 부담을 떠넘기며 "하명하시면 따르겠다"고 겁박하듯 재촉한다. 김류 등은 애초에 제대로 된 말을 한 적이 없다.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칸의 대포소리처럼 더 요란한 소음이 울리면 순식간에 묻힌다. 칸이 나타나자 조정에는 진짜 말만 남는다. 항전하자던 김상헌의 말과 화친하자던 최명길의 말이 그것이다.

두 사람의 말 중 무엇이 옳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은 일관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관성은 진실성을 전제로 하며, 진실성은 주체적 선택이 있고서야 가능하다. 즉 그들이 벌인 말의 전쟁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 말의 내용이 아무리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한 줌의 군사도 없어 동상 걸린 백성을 성벽에 올려보낸 조선이다. 그런 나라가 대륙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랑거철이다. 그럼에도 김상헌의 말이 진중하게 울리는 이유는, 죽기를 각오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자는 그의 주장이 진심이기에 그렇다. 최명길은 어떤가. 소중화(小中華)의 미몽에 잠긴 조선 사대부로서는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치욕은 죽느니만 못하다. 그러나 그렇게 떠드는 자들도 실은 구차하게라도 살고 싶어 한다. 최명길은 비겁한 자들이 내심 바라는 것과 똑같은 말을 내뱉되, 의도는 결코 같지 않다. 최명길은 절대 비겁하지 않지만, 겁쟁이들이 뒤집어써야 마땅한 침과 오물과 야유를 혼자 감당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왜, 무엇을 바라서 고도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다릴 것을 '선택'한다. 선택하므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린다는 점에서 부조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만, 이유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점에서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꼭 이유를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고 계산을 끝내야 실천에 나설 수 있는 데 능숙하기에 그렇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원래 뭔가를 얻거나 이루기 위한 수단인 '기다림'을 목적으로 역전시킴으로써 우습지만 숭고한 이야기를 빚어낸다.

김상헌과 최명길 또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뭔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평화다. 하지만 올지 안 올지 모르는 평화를 전심을 다 해 기다리는 것은, 더군다나 호란 당시의 남한산성 내에서라면, 그 기다림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만큼이나 애처로우며 까닭이 없어 보인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선택과 기다림은 필연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화를 기다리지만, 평화가 온다 한들 정작 본인들은 파괴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학적인 숭고함을 보인다. 스스로를 학대하고 패배시키고 마구 난도질함으로써, 그들이 무릎 꿇은 차가운 땅에 평화를 소환하고자 한다.

남한산성에 평화가 올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조선이 패배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면 주화파인 김상헌은 처벌을 면치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평화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형식이 투쟁이라는 점에서 최명길과 다르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함으로써 진정성을 입증한다. 그는 끝내 패배하여 스스로를 벌하였지만 실은 자신과의 전쟁에서 이겼다.

남한산성에도 평화가 올 수 있다면, 그 평화가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올 수 있다면, 그건 분명 감당하기 힘든 굴욕을 조선이 겪은 후에야 가능하다. 하지만 치욕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임금이 삼전도에서 엎어져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치욕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평화를 위해 잠시의 굴욕을 택하자는 최명길의 주장은 다른 모든 걸 떠나서 극도로 자기파괴적이다. 김상헌의 자기파괴는 육체를 파괴하는 일회성으로 그치지만, 최명길은 역사 속에서 항구히 거듭 파괴될 성질의 자학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결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선택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그 내용이 상반된다 해도 그것을 결심하는 동기에서는 전혀 다를 바 없다. 어쩌면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러나 그들은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고도를 기다림으로써, 막이 내린 후에도 그 기다림이 영원하리라는 인상을 관객에서 준다. 그럼으로써 저 둘의 기다림은 의미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상헌과 최명길은 평화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조선 전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을 기다림으로써 의미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남한산성을 채운다.

6. 남한산성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

'남한산성'은 임금이 머문다는 점에서 조선의 중심이지만, 세상과 격리되어 버려진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꽁꽁 얼어붙은 산성과 그 주변을 비춘다. 산성 안의 사람들은 산성 밖의 청병처럼 활달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산성에 갇힌 이들은 냉기에 휘감겨 얼어 있다.

얼어 있는 것은 잠재적 생명의 상태다. 동면하는 것은 깨어나 다시 살아갈 것을 지향하면서도 지금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남한산성'은 호란 당시의 얼어 있던 조선의 정신, 조선의 죽어버린 패기와 비루한 비겁을 정직하게 비춘다. 그리고 어떤 열기가 그 두꺼운 얼음을 깨부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김류 등은 산성의 얼음이 깨어진 후에도, 계절상의 봄이 와도 영원히 얼어 있을 자들이다. 그러나 김상헌과 최명길은 봄을 맞이하긴 힘들지 몰라도 언제나 깨어 있었다.

"그대도 나도 임금까지도, 낡은 것들이 사라져야 백성들의 삶이 열린다"라고 말한 김상헌은 그 말대로 스스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현전한다. "삶이 있는데 왜 죽음을 말하는가"라고 김상헌에게 묻는 최명길은 자신이야말로 이제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한다. 그는 살기 위해 임금을 욕보인 자로 불릴 것이며,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실은 가장 비겁한 자들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남한산성의 봄은 그렇게 찾아온다. 봄을 맞아야 할 사람들은 겨울의 성(城)에서 삶이 정지되고, 삶의 자격이 없는 자들은 남루한 생을 더 연장하게 된다. 산성의 봄은 불완전하게, 하지만 익숙한 풍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단단한 겨울에 균열을 가하여 봄을 되찾은 힘까지 폄하될 수 없다. 얼어붙었던 세계는 진정성과 진실이라는, 보기 드문 열기로 활활 타올라 녹아내린다. 그렇게 녹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남한산성에는 날쇠와 나루만이 남는다. 청병도, 임금도, 군마도, 숱한 논쟁도 몽땅 사라진 자리에는 아주 평범하지만, 가장 진솔한 욕망만이 남는다. 살고 싶다는 것, 그 힘이 나루를 남한산성까지 데려다주었고, 날쇠가 살아남게 하였으며, 김상헌과 최명길이 최선을 다하여 말의 전쟁을 치르도록 추동했다.

'남한산성'은 '삶의 보존'을 다루되, 그 욕망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되, 정작 전투 장면이 드문 이 영화가 집중하는 진짜 전쟁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모색이다. 이런 고민이 희박해지는 때, 이 영화는 관객을 향해 묵직하게 포복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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