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찾은 길] 단어 하나에 마음 뺏겨 가슴 떨리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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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최명희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작가가 남긴 처절한 글귀다. 그런데 <혼불>을 읽으면 수긍하게 된다. "글자 하나하나가 내 피와 살과 같다"는 작가의 말이 진실이란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처음 <혼불>을 읽었을 때, 우리말과 우리 표현의 보물창고를 여는 것 같았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곳곳에 담긴 우리 문화와 전통의 아름다움이 너무 귀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던 마음도 생생하다. 때문에 열 권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을 읽는 일이 더뎠을 것이다. 사용된 단어 하나에 종일 마음이 붙잡히고 작가의 손이 그려낸 풍경에 가슴이 떨려서 정말 공을 들여 읽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청명하고 별 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바람 하나에 이런 묘사가 가능한 건 우리 민족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내용만 아는 데 머문다면 아깝다. 손해다. 소설 속에 그려져 있는 우리의 고유 언어와 문화는 또 얼마나 다채로운가? 그래서 <혼불>은 우리 민족의 참고서가 된다. 분주하게 내달리는 세상을 살아가느라고 표현을 아끼고 거친 말로 응수하며 지내는 메마른 우리 모두, <혼불>이 내리치는 문화와 전통의 매를 맞기 바란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작가 최명희가 들려주는 영혼의 피 울음 소리를 듣기 바란다. 


장재봉


천주교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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