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문화 톺아보기] 22. 초량왜관을 다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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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초량왜관연구회의 발걸음, 21세기 한·일 관계 생각하게 하는 큰 울림

용두산공원에 있는 '초량왜관' 표석. 부산일보DB·부산초량왜관연구회 제공

얼마 전 조선통신사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통신사 기록이 증명하듯이 조선시대 조·일 교류의 역사는 곧 부산의 역사였다. 그 조·일 교류 역사의 한가운데 초량왜관이 있다. 하지만 우린 조선통신사는 알아도, 정작 초량왜관에 대해선 잘 모른다. 

'새띠벌의 메아리' 10호 표지.

초량왜관은 부산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었다. 초량왜관의 위치는 지금의 용두산공원 일대로, 오늘날 동구 초량동과는 조금 다르다. 왜인들의 거주제한지역이었던 초량왜관은 조선 숙종(1678년) 때 설치돼 1873년까지 200여 년간 이 땅에 있었다. 그 규모는 무려 10만 평에 달했다. 
 
초량왜관은 1876년 개항(강화도 조약)되면서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고, 일제 강점기에 일제 침략의 전초기지로서 부산부의 중심이 되었다. 주체가 조선 정부에서 일제로 변해간 것이다. 이런 영욕으로 인해 마치 초량왜관이 일제의 대륙침략 교두보 역할을 전담했던 것인 양 오해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게 초량왜관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의 시각인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초량왜관을 연구하는 비영리 민간단체가 있다. 바로 부산초량왜관연구회(회장 강석환)이다. 2010년 2월 창립돼 올해로 8년째. 부산시민들에게 초량왜관의 실체와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월 연구발표회를 여는가 하면, 학술대회와 역사유적지 답사, 책자를 꾸준히 발간하기도 한다. 특히 2014년 3월엔 소식지 성격의 잡지 '새띠벌의 메아리'를 창간, 초량왜관 알리기에 나섰다. 최근엔 그 10호를 발간했다. 처음엔 1년에 네 차례, 지금은 두 차례(여름·겨울호) 발간으로 이어오고 있다. 잡지 제목 '새띠벌'은 '초량 들'이라는 뜻이다.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부산초량왜관연구회 강석환 회장은 "10호 발간까지 많은 분의 노력과 도움이 있었지만, 사회단체 지원금으로 1년에 600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해 주고 있는 중구청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며 특별히 고마움을 전했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 회원들의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 답사 장면.
연구회는 2013년 '초량왜관 복원 왜 필요한가'를 주제로 한일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그 외연의 폭을 꾸준히 넓혀 왔다. 올해 5월에는 연구회와 부산 중구청의 노력으로 중앙동 주민센터 인근에 초량왜관 안내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덕분일까, 출발 땐 회원이 20여 명이었던 게 지금은 12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늘었다.

강 회장은 "처음에는 왜관 연구를 하고 관련 소식지를 낸다고 하니 다들 일본의 들러리를 서냐며 핀잔을 주거나 이상하게 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많이 없어졌다. 한일 간 평화시대를 공부·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웃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앞으로 국제교류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연구회의 목적이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우리를 침략해 고통을 안겨주었는데도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다며 분한 마음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는 우리들. 한국에 고통을 준 것은 알지만 언제까지 사죄만 하라고 하느냐는 일본인들. 그 사이의 간극에서 부산초량왜관연구회의 움직임은 다시 한번 한일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을 잠깐 빌린다. "21세기는 이미 한 사람의 체온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도 일본도 점점 작아지려는 마음을 떨치고 서로의 마음과 지혜를 합쳐야 할 때이다."

'새띠벌의 메아리' 박원호 편집장은 말했다. "왜관은 분명 우리 땅에 있었는데, 우리가 연구하지 않으면, 일본이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서 초량왜관에 대해 쉼 없이 연구하고, 소식지를 발행해 시민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지피지기(知彼知己)라 했던가?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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