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내가 너희를 놀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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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인간이라는 복잡 미묘한 동물들이 엮어 온 소위 역사라는 시간의 경과에는 그 갈피마다 매니페스토(manifesto), 즉 선언(宣言)이라는 말놀음이 소경 작대기처럼 끼어 있다. 혹 "사람의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놀이다"라는 명제에 거부감을 가진 엄숙주의자들께서 놀음이라는 단어를 꺼리신다면 말폭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대 정치나 사회의 꼬락서니에 맘이 아주 편치 못한 일군의 무리들, 한퇴지(韓退之)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불평인(弗平人), 허균 말대로라면 이른바 호민(豪民)들은 혼자 저주를 구시렁대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야, 이 호로자석들아!"로 시작되는 말폭탄을 뻥 터뜨려 세상을 뒤집는다. 내 어릴 적 부평동 사거리 시장에서 뻥튀기 할배가 기계에 장작불을 때다가 튀밥이 터질 만큼 익으면 "에라이, 간다!" 하고 외치며 뚜껑을 열어젖히는 것과 꼭 같은 이치다. 그러면 어떤 자는 혼비백산하고 어떤 자는 용약환희하여 위아래는 전도(顚倒)되고 인심은 표변하니 그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변(事變)을 촉발하는 선언이란 울부짖음이야말로 진짜 핵폭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인류 역사의 갈피마다 빛나는
매니페스토, 즉 선언의 말폭탄
'일 없어 심심하면 놀아 보는 것도…'

하필 올해는 로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콜로세움 한구석에서 노예해방선언을 한 지 2090년, 고려 노비 만적이 동료들 앞에서 계급타파선언을 한 지 819년, 카를 마르크스가 시커먼 수염을 휘날리며 공산당선언을 한 지 169년 되는 뜻깊은 해다. 어디 그뿐인가. 문예상으로도, 정치와 돈에만 온통 관심이 쏠린 속물들을 비웃으며 쉬르 레알리스트들이 초현실주의강령을 선언한 지 93주년, 보들레르가 위선적인 지식인을 냉소하는 악마주의를 선언한 지 160주년이다. 이 역사적인 해에 민주주의가 만발하다 못해 누렇게 익어 가는 한반도에도 세계사의 진운에 뒤질세라 각양각색의 구호가 거리를 메우고 허공을 장식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같이 일 없고 심심한 일심당원들도 주막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주모의 눈치를 받아가며 두부 반 모를 안주로 소주를 홀짝이다가 한 편의 장엄한 매니페스토를 공모(共謀)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리라.

우선 일심당은 인류 공통의 이상인 자유 평등 박애사상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할 것이다. 그가 태극기를 흔들었건 촛불을 켜들었건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로운 출입과 진퇴를 허용하니 석가여래의 "만사평등(萬事平等) 무비평등(無非平等)"이 바로 이 아닌가. 또한 "일 없고 심심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놀게 하리라!"는 당헌은 박애와 평등을 앞서 주창한 예수 말씀을 외람되지만 잠시 실례한 것이다. 이 놀라운 진보적 사상들은 현실정치에서 그대로 구현될지니 가령 당원 비밀회합에서 당일 당회의 모든 술값은 그가 재벌이든 노숙자든 상관없이 반드시 n분의 1로 분배된다. 술고래와 술새우의 생래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반론도 물론 있을 터이니 일단 주석에 참여한 자에게는 소주 1병에 상당하는 주종(酒種)이 주어질 것이며 그걸 인도적 견지에서 다른 이에게 양도하거나 양수 받는 것 또한 자유다. 단 2차부터는 주석의 이동을 앞장서 창도한 자가 모든 금전상의 책임을 지는 선창자 지불원칙이 적용되니, 이는 당원을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보호함과 아울러 평생에 한 번쯤은 남 앞에서 우쭐대고 싶은 인간의 본능마저 배려한 인도적 조치라 할 것이다.

이상(李箱)의 명수필 '권태'를 되씹을 것도 없이, 인류문명의 위대한 인문학적 성취는 모조리 권태에서 나오나니, 권태에 한껏 나른한 일심 동지들이 호혜와 평등에 기초해 쑥덕공론한 이 매니페스토야말로 육당 선생의 '조선독립선언'에 버금갈 우리의 발버둥이 아니겠는가. 노는 일은 무위도식이 아니라 호모 루덴스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라고 인류학자 하위징아도 말했으니 자미가 넘치게 노는 걸 부끄러워 말라. 존경하는 시인 이태백은 진작 "등불 밝혀서 밤을 낮 삼아 한껏 놀자꾸나!"라고 큰소리쳤고 우리 옛노래에도 "노세 노세. 늙어서 놀아! 젊어서 못 놀았으니, 늙어 노세!"라고 절규하지 않았던가, 아아. 착수가 곧 성공이라. 만국의 일심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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