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책방골목의 위기] '책방 골목' 가보니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책 사는 사람 없고, 관광객 '인증샷' 셔터 소리만…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은 각종 TV프로그램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로 소개되면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 됐으나 정작 책을 사가는 관광객은 찾기가 힘들다. 정종회 기자 jjh@

"보수동 책방골목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입니다." 5일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만난 한 상인은 책방골목의 위기를 이같이 표현했다. 상인들의 고령화와 대형 서점들의 중고시장 공습으로 부산의 근대자산이자 전국 유일한 책방골목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골목 곳곳에 '점포 임대' 나붙어
점주들 고령화에도 후계자 없고
대형 중고서점 공세 겹쳐 사양길

TV 소개되면서 방문객 늘었지만
정작 책 구매하는 손님은 드물어

■골목에 불어닥친 한파


'책방 하실 분.' 지난 4일 오전 11시. 보수동 책방골목 초입. 굳게 닫힌 A서점 셔터 위에 다음 주인을 찾는 종이 한 장이 나풀거렸다. 점심 시간이 지난 뒤 느지막이 셔터를 열며 사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책방골목에서 미국, 일본, 프랑스 등지의 원서를 팔았던 이 서점은 지난달 1일 자로 가게를 내놨다. 올해로 72세, 고령의 주인은 "나이가 많고 몸도 아프고 힘들어서 이제는 내려놓을 계획이다"고 말했다.

바로 옆 서점의 상황도 마찬가지. 1965년부터 이곳에서 각종 수험서, 사전 등을 팔아온 B서점도 4개월 전 점포를 내놨다. 주인 김 모(75) 씨는 "서점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김 씨는 "50년 동안 책방골목의 흥망성쇠를 겪었지만 이젠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며 장사를 접게 된 사연를 털어놨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 등에 따르면 책방골목 상인들의 평균 연령은 60세가 넘는다. 60대 이상의 점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언제 가게 문을 닫을지 모르는 70세 이상의 고령자도 10명 이상이다. 고령의 가게 주인들은 "수입이 안 나는 장사를 더 잡고 있을 여력이 없다"고 푸념했다. 책방 골목에 불어닥친 한파를 고령의 서점 주인들이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들을 위협하는 건 고령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부산지역 곳곳에 들어선 대형 중고서점의 습격은 끝내 이들을 살얼음 길로 내몰았다. 지난해부터 부산지역에는 7개의 대형 중고서점이 들어왔다. 본보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9월 수영구에 문을 연 대형 중고서점 Y사에는 하루 평균 2500명의 방문객이 찾았다. 하루 평균 50여 명이 찾는 책방골목 서점은 이들 '공룡 서점'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책방골목 상인 중 일부는 대형서점 인터넷 사이트에 중고책을 올리기도 하고 손님들의 연락처를 받아 카톡으로 새로운 책 입고 등을 알려주는 새로운 시도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TV에만 반짝, 관광객만 반짝

2011년과 2012년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에 책방골목이 모습을 내밀면서 상인들은 반짝 기대심리에 부풀었다. SNS 등을 통해 젊은이 사이에서 책방골목이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자 골목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인증샷'의 배경만 필요로 할 뿐이었다.

책방골목에서 20년째 책을 팔고 있는 C서점 주인은 "오래된 책을 찾아 달라고 한 뒤 책 사진만 찍고는 정리도 안 하고 그냥 간다"며 "예의 없는 관광객들의 행태에 지쳤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4일 골목 끝에 위치한 D서점에서 주인과 함께 1시간가량을 지켜봤지만 책을 사 가는 관광객은 없었다. 인천에서 부산으로 여행 온 최가희(28·여) 씨와 엄기표(28) 씨는 "분위기가 좋아 골목 곳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면서도 "책을 구입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책방골목을 드문드문 찾는 관광객 속에도 오랜 시간 책방골목을 찾는 '골수 독서꾼' 사이에는 책방골목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일부 서점의 폐점 소식이 알려지자 매일 서점을 찾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이날 잡지 세 권을 사러 책방골목을 찾은 장재경(51·여·영도구 남항동) 씨는 "책값이 부담돼 예전부터 자주 찾았다"며 "책방골목을 시민들이 함께 지키기 위해서 자주 찾자는 시 차원의 캠페인 같은 것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 달에 두 번가량 한국학 고서를 구입하러 책방골목을 찾는 김민한(84·부산진구 초읍동) 씨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단종 된 고서를 구할 수 있는 전국 유일무이한 공간이다"며 "서울 청계천, 인천 배다리의 헌책방 골목이 모두 문을 닫은 상황에서 고서를 지키고 역사를 지키는 유일한 공간이다"고 강조했다.

김준용·서유리 기자 jundragon@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