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아랫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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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요즘 세상에서 없어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랫목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의 주거 환경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바뀐 탓에 집이라고 하면 아무리 주택이라 할지라도 아파트의 내부같이 짓기 마련이다. 아파트에선 모든 방이 한 평면 위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따뜻함도 한 평면 위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일러는 집안의 공기를 다 똑같이 평준화한다. 옛날 주택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방이라 할지라도 아랫목과 윗목이 있었다. 그 둘의 온도는 절대 하나로 평준화되지 않았다. 따끈한 아랫목은 그 집안의 가장 어른의 몫이거나, 혹은 항상 담요 같은 것이 깔려 있는, 포근한 어떤 곳, 빛깔로 치자면 오렌지빛의 그런 곳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아랫목에는 늘 담요가 깔려 있었다. 요즘 담요 같은 보들보들한 극세사의, '모던한' 담요가 아니라, 거친 진초록빛의 군용 담요. 그 아랫목 담요 밑에는 늘 밥 한 그릇이 있었다. 늦게 오는 식구를 위하여 식지 말고 오랫동안 따뜻하라고 어머니가 넣어 놓은 것, 그러니까 아랫목의 그 담요는 요즘의 그 흔한 보온밥통인 셈이었다. 비닐에 싸여 냉동실에 던져져 있던 밥을, 혹은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것과 그 담요의 온기를 어찌 비교하랴.

아파트살이로 잃어버린 옛 풍경
아랫목 담요 밑엔 따뜻한 밥 한 그릇
원탁회의라도 하는 듯 둘러앉았고
오늘, 그 밤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식구들이 돌아옴에 따라 아랫목은 원탁회의장 같은 곳이 되었다. 식구들은 거기 담요 밑에 발을 넣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단감을 깎아 먹거나, 사과를 깎아 돌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불평 사항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묻기도 하고. 정치적인 이야기로 서로 열을 올리기도 하고… 마치 원탁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갑자기 생기가 난 이모의 빠른 말소리, 또는 말씀이 끝나길 기다리려면 침을 몇 번이나 꼴깍 삼켜야 하는 할머니의 느리디느리신 낮은 말소리… 그곳은 순간 식구들을 '원탁의 기사'로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원탁의 기사'가 된 식구들은 쉽사리 거기서 발을 빼지 않았다. 담요 밑에서 그들의 발은 서로 부딪히며 서로를 응원하곤 했다. 어머니의 손은 아랫목에서 늘 바쁘셨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발들에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 주시느라고.

다음은 사진작가 육명심 선생이 어떤 시인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 덧붙여 쓴 글이다.

독일의 한 지방, 별로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에 작은 호텔이 하나 있었다. 늙은 주인과 종업원을 다 합해도 열 명이 안되었다. 종업원 중에 한 노인이 있었는데 노인은 그곳에서 나서 자랐으며 한평생 외지에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배운 것도 재주도 없어서 일평생 그의 직업은 그 호텔의 종신 청소부였다. 어느 날 한 현자가 그 호텔에 묵게 됐다. 이 늙은 청소부는 현자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이는 부귀공명을 누리고 살고, 당신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귀한 몸인데 나는 평생을 호텔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잠자코 청소부의 하소연을 다 들은 현자는 이윽고 이런 대답을 하였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으로 고귀한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당신은 신이 창조한 지상의 한 공간을 일생동안 날마다 깨끗이 쓸고 닦았습니다. 마치 성당의 제기를 닦는 것과 다름없이 그렇게 정결한 봉사를 했습니다."

한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다 세상을 뜬 시인, 나는 이 일화를 시인에 대한 설명으로 대신하고 싶다.

윗글에 나오는 현자의 대답에서처럼 '아랫목'은 비현대적인 옛날 식의 어떤 곳, 그래서 개조되어야만 할 곳이 아니라, 자기의 온몸을 따끈하게 끓임으로써 그곳의 거주자들에게 봉사한, 일종의 대화방이 아니었을까. 신이 창조한 지상의 한 공간을 늘 따뜻함으로 닦았던 공간. 오늘 밤 아파트의 한 방에 앉아 지상을 떠나간 어떤 혼의 울음소리처럼 창을 울리고 지나가는 초겨울 바람소리를 들으며, 아랫목을 잃어버린 사람의 초상들에게 이 사진작가는 어떤 캡션을 달까? 하고 생각을 한다. 아니 오늘의 나에겐 어떤 캡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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